글쓰기 모임 이번 주 주제는 ‘노잼시기’이다. 노잼시기라… 어려운 주제다. 누구나 겪는 시기이기 때문에 쓸 이야기가 많아 보이면서도 진부해질 수도 있어 걱정이 됐다. 주제가 정해진 후 뭘 써야 할지 며칠 동안 고민했다.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써야 하나? 으…생각만 해도 재미없다. 노잼의 수렁으로 빠질게 뻔했다. 그리고 혹시 이 글을 노잼시기를 겪는 사람이 읽는다면 미안할 것 같았다. 이때는 뭘 봐도 감흥이 없기 때문에 굳이 노잼 하나를 더 보태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극복기에 대해서 써야 하나? 그것도 아니었다. 많이 겪어보긴 했지만 완벽한 극복 방법을 도통 모르겠다. 답을 모르면서 어설프게 아는 척하면 들통이 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운동, 취미생활, 연애 등으로 잠깐 극복을 해도 이 시기는 또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극복 방법 같은 이런 거창한 접근은 하지 않기로 했다.
참 이렇게 걱정이 많으니 뭘 쓸 수 있겠나 싶어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몇몇 사람들에게 노잼시기에 대해 물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대답을 해줬지만,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후배의 대답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재미없다. 재밌는 거 없어? 재밌는 얘기해 줘.”
내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매일 듣는 말이다.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나는 항상 재미를 갈구하는 사람. 나에게는 어떤 주제로 시작해도 항상 ‘집에 가고 싶다’라고 끝맺는 대화를 나누는 회사 후배가 있다. 그 친구에게도 가끔 저 말을 하는데, 그러면 “선배! 회사는 원래 재미라는 게 있을 수 없는 곳. 이제 좀 포기해!”라는 대답을 듣는다. 이것이 무한 반복되던 어느 날, 사실 비슷한 내용이지만 ‘노잼시기’라는 단어로 바꿔서 물었다. 이게 효과가 있었다. 이 친구가 웬일로 진지하게 대답을 해줬는데 상당히 인상 깊었다.
“노잼시기가 있어?”
“나는 작은 거에 좋아하고, 작은 거에 쉽게 빡치는 사람. 그리고 알아서 잘 웃고 잘 울고 잘 풀려. 그냥 공원 한 바퀴만 돌아도 혼자 감동받아. 강아지만 봐도 기분이 좋고. 강아지가 내 옆에 오면 더 기분이 좋고. 좋아하는 노래 들음 또 기분이 좋고. 천천히 걷는데 안 피곤하면 또 기분이 좋고. 약간 그런 타입? 정신승리형. 나 생각보다 온순하고 인생 즐겁게 살아. 굳이 어디 막 다녀야 되고 맛있는 거 먹어야 되고 여행 못 가면 우울하고 이렇지 않아서. 난 계속 새로운 걸 안 찾고 예전에 좋아했던 걸 하고 또 해도 좋고 만족해. 그냥 쉽게 좋아하고 덜 질림”
“와 진짜???멋있다!!!!!”
이걸 대화창에서 실시간으로 보는데 머리를 한대 맞은 것 같았다. 사실 우리 대화 주제의 특성상 이 친구도 나와 비슷하게 냉소적인 줄 알았다. 근데 전혀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잔잔한 에세이를 읽은 느낌이었다. 별 기대 없이 오히려 타박 당할 걱정을 하며 노잼시기에 대해서 물었는데 이런 고퀄리티 행복론을 듣게 될 줄이야.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야기의 주제가 갑자기 ‘재미’에서 ‘행복’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간 걸 깨달았다. 이 친구에겐 어떻게 보면 재미도 행복의 한 부분인 것 같았다. 즉 일상에서 비교적 쉽게 느낄 수도 있는 ‘재미’도 곧 ‘행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재미와 행복을 철저히 분리해 생각했었다. 근데 이 말을 듣고 보니 답은 없는 문제고, 본인이 생각하기 나름인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놀라던 중 질문이 훅 들어왔다.
“선배는 어떨 때 행복한데? 생각해봐”
“내가 행복할 때? 일단 지금은 아니고. 시험에 합격하거나 자격증 땄을 때? 조기 졸업 허가받았을 때! 시험 성적 올랐을 때. 그리고 내가 존경하는 사람에게 인정받았을 때! 또... 여행 갔을 때. 좋은 사람과 연애를 시작했을 때. 감동 받을 만한 무언가(책, 음악, 영화, 물건 등)를 발견했을 때. 예쁜 옷을 샀을 때, 깜짝 놀랄 정도로 맛있는 걸 먹었을 때? 대략 이 정도?”
내가 생각하는 행복을 나열해보니 정말로 찐 행복이었다. 큰 행복이지만 일상생활에서 자주 일어나지 않는 일들. 내가 생각해도 행복의 역치가 매우 높았다. 그리고 과거에 했던 것들은 재미가 없고 새로운 걸 해야 재미가 있었다. 아무리 재밌게 본 영화나 드라마였어도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는 한 또 보진 않는다. 다른 사람의 행복의 역치는 어디일까? 다들 다르겠지. 근데 난 유난히 높은 것 같다. 질적 공리주의자도 아니고 효용이론을 연구하는 경제학자도 아니면서 행복(효용)을 계량화하고 순위를 매기려했다. 특히 요즘엔 '행복하다'라는 생각을 별로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 봐봐 우린 정말 달라. 선배의 행복 역치는 너무 높아서 내가 재밌는 얘기를 해줘도 선배를 만족시킬 수 없어.”
그렇다. 나는 행복의 기준을 상당히 높게 정해놓고, 항상 행복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이 친구가 정말 구구절절 맞는 말만 했다. 생각보다 되게 어른이었다.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하는 대화창에서 본인의 행복론을 펼치고 있었다. 조금 더 오버를 하자면 소크라테스의 산파법이 이런 걸까? 이 친구가 나에게 깨우침을 줬다. ‘행복에 민감해져라. 행복을 증폭해 생각해라.’ 라는 말을 많이 들어봤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마음이 전혀 동요되지 않았다. 근데 내 주변 사람이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크게 와닿은 것 같다.
행복의 역치를 낮추는 방법을 배웠다. 굳이 행복의 역치를 높게 설정해놓고 스스로 '나는 왜 행복하지 않지?'라고 고문할 필요가 있을까? 여태 동안 난 그래왔었다. 쉽게 행복해진다고 쉬운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누가 비난을 하지도 않는다. 단지 내 생각과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행복의 역치를 낮추는 것이 마음이 더 편할 것 같다. 주변을 관찰해 보면 항상 기분이 좋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무슨 좋은 일이 있냐고 물으면 "그냥 드라마가 재밌잖아", "이번엔 내가 올린 결재가 빠르게 났어", "내 염소가 출산했어!감동적이야(농사 게임...^^)"라고 한다. 근데 '에이 그냥 하는 말이겠지'하고 넘어갔는데, 이게 진심이었던 것이다! 쉽지 않겠지만 나도 배운 대로 실천해보려고 한다. 그냥 그 순간 몰입하고 재밌으면 그게 행복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