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만의 출근 (두 번째)
오후에는 시간이 안 돼요!
1. 의도하지 않은 취업
2. 내 자리가 없다고?
3. 오후에는 시간이 안 돼요!
4. 미투의 빈자리로
5. 교감*
6. 드디어 방학에도 돈을 받는구나!
7. 이게 아닌데...?
3. 오후에는 시간이 안 돼요.
약간의 좌절감이 있었지만 내 이력서에는 2주간의 경력이 생기는 성과가 있었다.
잠시 마음을 추스른 뒤에 일주일간의 경조사 휴가 시간강사에 도전했다. 이력서를 쓸 때 오후 시간은 불가능하므로 오전에만 근무 가능하다고 썼다.
(공강 없이 오전으로 시간표 변동을 해주면 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학교 측에서 바로 연락이 왔다.
면접과 동시에 수업을 하고 오전으로 시간을 몰아주겠다고 했다. 지원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나의 요구사항을 들어준 것 같다.
역시 서울 한복판에 있는 여자 중학교였다.
학교에 가서 교감, 교장선생님을 만나고 안내해 주는 데로 진로실에 올라가 보니 아이들이 와서 수업을 하는 방식이었다. 무엇보다 진로실에 앉아서 아이들을 기다리면 되니 마음고생이 전혀 없었다.
또한 남학생보다는 여학생의 수업이 한결 수월했다. 나는 이전보다 훨씬 더 편안하게 오전 근무를 하고 일주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그래도 마지막 수업까지 하고 나니 긴장이 풀리면서 며칠 동안 끙끙 앓았지만 자신감은 많이 충전되었고 이력서에는 두 줄의 시간강사 경력이 써지게 됐다.
4. 미투의 빈자리로
2018년에는 사회 전반에 미투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뉴스에 놀라곤 하던 때였다. 교육청 구인란에 아주 가까운 곳에 3개월 기간제를 뽑는다고 올라왔다.
도보로 걸어갈 수 있는 학교였다.
그 학교에 근무하는 국어 선생님 한 분이 미투에 연루되어 파면까지 당했다는 뉴스가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학교에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수 조사가 이루어졌고 일곱 명의 샘들이 직무정지를 당하면서 조사에 들어갔다. 그 샘들 중에 진로샘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그 조사기간에 3개월 기간제 샘으로 채용되었다. 남자 선생님이 함께 면접을 보았지만 학교 측에서는 여자인 나를 원했다.
모두 일곱 명의 동료 기간제 샘들이 생겼는데 모두 30대 초반의 샘들이었고 나와는 나이차이가 20살까지 벌어졌다.
학교는 역사가 깊은 사립 여자 고등학교였고 샘들의 평균연령이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처음으로 진로 교무실에 내 자리가 생겼고 노트북이 지원됐다.
다섯 명의 선생님이 함께 근무했고 가끔 오는 체육 시간강사를 제외하고는 내가 가장 어렸다.
정교사 시절 고등학교에 근무했기 때문에 중학교보다는 모든 게 편안하고 익숙했다.
나는 수업보다는 거의 진로 공문을 처리하고 기안을 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다.
아이들의 진로수업에는 많은 지원금이 교육청, 시청, 도서관등에서 책정되었고 나는 그 돈을 잘 이용해서 아이들의 수업에 활용해야 했다.
아직 수업도 자리를 못 잡았는데 막막했다.
더군다나 의논을 나눌 샘이 없었다.
다른 과목은 여러 샘들이 협의가 가능하지만
진로는 한 학교에 한 명이 대부분이라서 벼랑 끝에 혼자 서있는 기분이었다.
수 년동안의 문서들을 뒤져보면서 해결했고
집에 와서도 수업이나 행사 생각이 멈추지를 않는다
미투 파동으로 학교 분위기도 많이 뒤숭숭했다.
샘들은 많이 위축되어 있었고 아이들은 기세등등했다. 위축되어야 할 샘들이 위축되는 건 당연한 거였지만 내가 보기에 위축되서는 안 될 샘들까지도 위축되었다. 이런 혼란기에 기둥이 될만한 관리자도 교사도 없어 보였다.
아이들은 젊은 기간제 샘들과 잘 어울렸다.
아무래도 50대인 나는 아이들과 가까워지는데 한계가 있었고 아이들과 친구 같은 마인드로 임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다는 걸 깨달았다.
또한 동료 기간제 샘들이 같은 나이의 50대 정교사에게 대하는 태도와 50대 기간제인 나에게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외롭고 갑갑하고 힘든 나날들이었다.
진로 부장에게는 일을 잘한다는 평을 받았지만 나는 슬슬 학교에서 마음이 떠나고 있었다.
(진로 부장은 진로 과목이 아닌 사회 샘이 맡으셨다)
내가 왜 정교사를 때려치웠었는지 고민했던 시간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와중에 3개월 계약기간은 2개월 연장이 되어 겨울 방학 전까지 근무하기로 했다. 직무 정지당한 샘들의 조사 기간이 길어지면서 생긴 일이다.
주위에서는 나에게 대단하다는 평가와 주부였을 때와는 다른 대접을 했지만 정작 나의 속마음은 썩어가고 있었다.
드디어 시간은 흘러 마지막 날이 왔다.
아무리 뭐라 해도 미우나 고우나 어린 동료들이 있어 버틸 수 있었다.
(진로실 옆자리 샘들이 심하게 사이가 안 좋아 언성을 높여 싸울정도여서 나는 그 누구와도 친해질 수 없었다.)
우여곡절 힘든 점도 많았지만 덕분에 배우기도 많이 배운 시간들이어서 감개 무량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와서는 이제 그만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동안의 수입은 한 푼도 안 쓰고 통장에 그대로 있다.
나는 계속 일을 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남편의 수입만으로 생활하는 패턴을 유지하기로 했다.
50대 나이에 생계형으로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통장에 쌓인 잔액을 보고 있으니 자꾸 딴생각이 든다. 몇 년만 고생하면 훨씬 안락한 노후가 보장이 될 것 같고 십 년이 넘게 끌고 다니는 남편 차도 바꾸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이 멈추지를 않는다.
더구나 실업급여를 받으려면 한 달 정도 더 근무를 해야 가능했다. 실업급여에 대해서는 어린 동료들에게 들었는데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그네들이 이구동성으로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결국..
순전히..
실업급여 때문에 1학기 기간제를 지원했고 그렇게 집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이 걸리는 중학교에서 두 번째 기간제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