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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 Sep 05. 2021

사랑니 떠나가네

또다시 내곁에서 이번엔 심각했지 마침내 사랑니었어

내 인생 거진 반을 함께한 사랑니가 사라졌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던가. 사라진 사랑니의 빈자리가 영 익숙지 않다. 입 속에서 혀를 이리저리 굴려 본다. 하나 둘 세어가며 도착한 끝 자리엔 사랑니가 아닌 미끌미끌한 잇몸만 혀 끝에 느껴진다. 사랑니를 뺀 지 이틀 째 여전히 비릿한 피 맛이 난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피눈물인가.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사랑니에 대한 기억은 중학생 때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자라나던 키에 무릎이 아파 잠을 설치던 때 엎친대 덮친 격 사랑니까지 양쪽에 나기 시작했다. 위아래로 고통이 쉴 새 없이 몰아쳤다. 사춘기 소녀가 견디기 힘든 그야말로 엄청난 성장통이었다.


사랑니 때문에 잇몸이 부어 잘 씹지 못하는 것도 큰 고통이었다. 친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우리 가족은 할머니가 계신 경주에 자주 내려갔다. 할머니는 우리가 갈 때마다 항상 경상도식 소고기 뭇국을 한 솥 끓여놓고 기다리셨다. 지금까지도 할머니의 소고기 뭇국보다 맛있는 뭇국을 먹어본 적이 없다. 잇몸이 퉁퉁 부은 나는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눈앞에 두고도 씹을 수가 없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그 옆에 어이없어하던 엄마의 얼굴도 기억한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쯤 키도 다 자라고 사랑니도 다 나고 나니 무릎의 통증도 잇몸의 통증도 싹 사라졌다. 정기 검진차 간 치과에서 나는 사랑니가 고르게 났기 때문에 굳이 뽑을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선생님은 내가 관리만 잘하다면 나중에 나이가 들어 틀니를 끼어야 할 때 이 튼튼한 사랑니가 틀니를 고정해주는 역할을 해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난 당연히 80살까지 나의 사랑니와 함께 한다 생각했다. 한데 지금까지 관리도 꽤나 잘했고 썩은 적 한 번 없던 사랑니가 갑자기 십몇 년 만에 새까맣게 썩어버린 거다. 치과에 가니 선생님은 사랑니는 치료를 할 필요 없이 바로 빼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어차피 사랑니는 다 썩으니 이참에 다른 사랑니도 다 빼라고 했다. 알고 보니 사랑니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 꽤나 쓸모없는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 모든 아픔을 참아내고 지금까지 애지중지하며 품고 있던 사랑니 었는데 이참에 다 빼버리라니. 이렇게 매몰찬 말이 어디 있나.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지금 와서 사랑니를 다 빼면? 그럼 내 틀니는 어디다 고정시키는데요?


나머지 사랑니는 나중에 빼겠다고 선생님을 속인 후 나는 기어코 썩은 사랑니만 빼겠다고 했다. 마취를 한 지 얼마 후 빠지직 소리와 함께 사랑니가 뽑혔다. 곧바로 잇몸을 꿰매느라 요리조리 돌아다니는 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나는 치과를 무서워하지 않는 편인데 이번에는 너무 무서워서 내내 온몸에 힘을 주느라 기진맥진해졌다.


선생님이 빠진 내 사랑니를 보여줬다. 사랑니의 뿌리가 V자로 크게 벌어져있었는데, 선생님이 이렇게나 많이 벌어져있는 뿌리는 뽑기가 아주 힘들다고 했다.


‘이런 이는 뽑을 때 나한테 욕을 해요. 나오기 싫다고.’


찡-. 보내주고 싶지 않았던 나만큼 너도 나오고 싶지 않았구나. 생각해보면 사랑니는 가장 늦게 나와 대부분의 경우 가장 빠르게 생을 마감하는 치아이다. 그 좁고 손길도 자주 닿지 않는 공간에서 본인도 얼마나 나오고 싶어 애썼겠는가. 그런 악조건에서도 바르게 나고 자라 지금까지 버티느라 고생이 참 많았다. 나는 치과 의자에 앉아 오래오래 함께 할 것 같았던 사랑니를 보냈다. 잘 가. 나는 사랑니의 마지막을 기리는 마음으로 거즈를 지긋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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