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씨는 친해지기 좀 힘든 성격이잖아.”
오랜만이었다. 한때는 적금 타듯이 정기적으로 들었던 저 소리를 간만에 또 들었다. 그것도 직장에서. 2년 전, 전 직장 하계 워크숍 일정이 끝나고 다 같이 왁자지껄 술을 마시는 와중에 인사팀 차장이 웃는 얼굴을 하고선 내 면전 앞에 바로 때려 박은 저 말. 진심 99.9%를 꽉 눌러 담아 놓고서 0.1%의 웃음이 섞였다고 농담이랍시고 하는 말. 과일 향만 첨가해 놓고 과일주스라고 우기는 놈들이랑 똑같은 놈이야 너는. 너무 맥락 없이 갑자기 저 말을 날리길래, 조금 전까지 무슨 이야기를 하던 중인지도 까먹어 버렸다. “하하, 그런가요? 제가 낯(짝)을 좀 가려서.” 나는 늘 그렇듯 나의 대쪽 같은 성격을 낯가림이라는 부드럽고 조금은 귀여울 수 있는 성격으로 둔갑시키려 노력했다. 1년이나 회사에 다녀 놓고 아직 낯을 가리고 있다니, 심하게 귀여운 변명이었으나 어차피 피차 취한 것 같으니까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아서 판단하겠거니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낯가림이 심하다고 생각했으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새로운 곳에 가는 것을 꺼려했고, 어쩔 수 없이 가게 되더라도 혼자 입을 꽁꽁 결박시켜 놓고는 남들에게 에너지만 빨림 당하는 힐러 역할을 내내 하다가 거의 반죽음 상태로 집에 와 뻗기 일쑤였다. 당연히 나는 스스로를 극명한 내향적인 사람이라 생각했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하며 지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사회에 나와 지난 몇 년 간 자의적이던 타의적이던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고 때로는 그저 스쳐 지나가며 나는 내향적인 성격이 아니라 (조금은) 호불호를 숨기기 힘들어하고 (조금은) 대쪽 같은 성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정확히 하자면 말을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하기 싫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거였다.
나는 나와 맞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을 유난히 힘들어하듯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유난히 힘들어한다. 인사팀 차장 앞에선 갓 돌이 된 애기보다도 말을 안 했으니 그 섭섭함 섞인 말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모르는 사람과 처음 만날 때 이 사람이 나와 맞는 사람일지 파악이 될 때까진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그 생각을 어떤 말투로 이야기하는지 그저 듣고 또 들었다. 프로 경청러의 자세가 아니라 먹잇감을 노리기 전 숨을 죽이는 사자의 자세였다. 잘 맞겠다 싶으면 난 그 사람을 냅다 물어 내 손아귀에 넣었고 안 맞겠다 싶으면 아무리 사람의 온기가 고픈 외로운 상태여도 대쪽같이 그 자리를 피했다. 자리를 피할 수 없다면 대화 섞는 걸 피했고.
사람은 안 변한다고 이제 와서 이러한 성격이 달라진 건 아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예전엔 나와 맞는 사람을 찾는 것에 소극적이었다면 지금은 좀 더 적극적이라는 것이다. 눈치 보며 듣고만 있다가 잘 맞겠다 싶은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게 아니라 남들에게 나를 표현하고 나와 맞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직접 다가오게 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고 할까. 나는 더 이상 낯선 사람이 먼저 나에게 말을 걸어줄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내가 나를 드러내야 나랑 안 맞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알아서 피하고 그와 반대인 사람들이 나를 찾아온다. 재미로 보던 MBTI 성격유형검사에서도 항상 변하지 않았던 내향성의 성격이 갑자기 외향성 성격으로 변한 것도 아마 이 이유일 터.
평생 본인 스스로를 알아가는 것도 어려운데 어떻게 남을 대화 몇 마디로 판단하겠냐마는 뭐 또 이렇게 자기주장 심한 호불호와 대쪽 같은 성격을 가지고 태어나게 해 준 부모님의 노고도 무시할 수는 없으니 최대한 잘 사용해 보려고 한다. 어차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척도 잘 못하는 성격이니 척하는데 힘쓸 시간에 적극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찾고 그 사람에게 더 많이 표현하고 더 많은 애정을 퍼부으면 그만이다. 대쪽이의 순정을 그런 사람에게만 보여주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