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여름, 나는 한국을 뜨겠다고 다짐했다.
사는 게 재미가 없어도 너무 재미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아침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듯 출근을 하며 지나가는 저 차가 알맞게 날치고 가줘서 다리 정도만 딱 부러트려 줬으면 아니면 어디 맹장이라도 터져서 방귀가 나올 때까지 병원에 입원해서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해외 취업을 알아보던 중 마카오에서 면접의 기회가 있었다. 평소라면 필요치 않은 정도의 고민을 해가며 갈까 말까 수 만 번을 망설였겠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비행기표와 숙소를 예약하고 면접 준비에 돌입했다. 고민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리 간절하지 않다는 말과 같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다시는 없을 기회에 다시는 없을 용기였다. 고민 없이 바로 면접 준비에 들어간 근래 없는 나의 결단력이 스스로 멋있었던 건지 그에 맞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이미 머릿속에는 최종 면접을 당당히 통과한 내가 행복하고 창창한 새 인생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디서 살아야 하나.”
“아, 여기 카페 좋아 보이는데 이 근처에서 살 수 있을까?”
“여기서 불같은 연애 해야지!”
무용하지만 행복한 상상들을 하다 보니 면접일이 다가왔다. 넘쳤던 자신감에 비해 소박한 능력을 가졌던 나는 계획대로라면 3일에 걸친 면접을 봤어야 하지만 마카오에서의 첫날, 첫 면접에 떨어지고 말았다. 성수기인 8월에! 숙소 값도 금값인 마카오에! 이 많은 돈을 쓰고! 단 10분 만에 면접관들 앞에서 갓 옹알이를 시작한 아기처럼 어버버 거리가 떨어지고 만 것이다. “10분 만에 니들이 뭘 안다고 날 떨어트려” 씩씩거리며 숙소로 오는 길 맥주를 잔뜩 사 들고 와 혼자 벌컥벌컥 마신 뒤 잠들었다.
다음날 머리가 깨질 듯한 숙취에 일어나 숙소 창으로 얄미울 만큼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바라보며 “아,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라는 생각에 냅다 울었다. 한참을 울고 나니 이상하게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마음이 편해지고 나니 이렇게 온 것도 온건 대 여행 온 셈 치자라는 생각이 들어 곧장 숙소 밖으로 나갔다.
그냥 걸었다. 아무 기대도 계획도 없었기 때문이다. 발길이 가는 데로 걷고 또 걸었다. 혼자 슬리퍼 찍찍 끌며 음침하게 걸어가는 내 모습이 길거리에서 사진을 찍고 있던 수많은 여행객들의 사진 속에 한 컷쯤은 걸렸을지 모르겠다. 한참을 걷다 보니 날이 어두워져 나는 들어갈 곳을 찾아 헤맸다. 술을 꽤나 사랑하는 나는 근처에 보이는 와인바에 냉큼 들어갔다.
“여기 화장실 아니야”
내가 와인바에 들어가자마자 들은 말이다. 아마 많은 관광객이 화장실인 줄 알고 이곳을 많이 들어왔었나 보다. 아무리 내가 행색이 초라해도 그렇지 여기 화장실이 아니라고 하다니. 면접 떨어졌다고 아저씨도 저 무시하세요? 라는 찌질한 마음이 들었지만 와인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던 나는 “알아, 나 여기 와인 마시러 온 거야”라고 답했다. 사장님이 당황한 표정으로 멋쩍어서 하더니 1층은 자리가 없다고 2층으로 나를 안내했다.
2층에 올라가자마자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한국에 있는 내 방만한 크기였는데 방을 딱 반으로 한 면은 책으로 가득한 서재 같은 공간으로 다른 한 면은 와인이 가득한 와인 보관소 같은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 중간에 아늑한 소파와 테이블이 있었고 나는 그곳에 혼자 앉아 이 순간을 운명이라 칭했다. “내가 이곳에 오려고 마카오까지 온 거였구나”
그곳은 외국인 노부부가 하는 작은 와인바였다. 혼자 온 내가 신경이 쓰였는지, 사장님 부부가 번갈아 가며 2층으로 올라와 나의 안부를 물었다.
“와인은 맛있니?”
“더 필요한 것 없니?”
“이것 좀 먹어봐 그 와인이랑 잘 어울려"
“너무 어두우면 저 불을 켜면 돼”
하도 이것저것 챙겨 주시길래 나는 먼 마카오에서 예산읍에 있는 외갓집의 향수를 흠뻑 느끼며 막걸리가 아닌 와인을 들이켰다. 와인 한 병을 마시니 얼큰하게 취기가 올라와 읽고 있던 책의 글자들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숙소에 이러다 굴러가겠다 싶어 자리를 뜨려고 1층에 내려갔더니 사장님 부부가 맥주를 마시고 있길래 “나도 한 잔 마셔도 돼?” 물었다. 손님도 이제 별로 없고 하여 사장님 부부가 같이 마시자고 하길래 나는 '딱 한 잔만 하자'라고 지키질 못할 다짐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두 분이 내가 왜 여기에 혼자 왔는지 궁금한 듯 보여서 나 사실 한국을 뜨고 싶어서 여기에 면접 보러 왔다고, 근데 하루 만에 떨어져서 어쩌다 보니 여기서 여행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단해 너 멋있다!”라고 부부가 동시에 말했다. 나는 조금은 슬프게 웃으며 “하나도 멋있지 않아. 10분 만에 떨어졌어. 돈을 이렇게나 쓰고 왔는데.”라고 하소연을 했다.
나 보다 두 배는 넘게 더 살았을 것처럼 보이는 사장님 부부는 “인생은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거야. 면접이든 뭐든 넌 마카오에 이렇게 왔고 이렇게 우리 바에 있고 그냥 잊고 이 시간을 즐기면 되는 거야”라고 말했다. 평소의 나라면 터무니없이 긍정적인 그 말을 시큰둥하게 들었을지 모르겠으나 그때는 그 말이 어찌나 큰 위로가 되던지! 그 뒤로도 꽤 힘이 되는 위로의 말들과 술들이 이어졌고 나는 사장님 부부에게 꼭 다시 오겠다는 말을 쿨하게 남기며 무사히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 날 나는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고 그렇게 마카오에서의 여행 아닌 여행이 끝이 났다.
나는 매사에 무덤덤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는 말을 꽤 맹신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마카오라는 곳도 그랬다. 마카오는 나에게 면접을 보는 장소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일단 여행으로 간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게 당연했다. 결국 내가 기대했던 면접은 떨어졌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그 바와 사장님 부부는 마카오의 기억 그리고 그날 밤의 기억을 소중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렇게 기대하지 않았을 때 선물처럼 다가오는 우연의 순간들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 우연이 지어낸 행복들을 내 가슴속에 오래오래 남겨두며 그리울 때마다 꺼내 먹는다. 그러니까 나는 오늘도 아무 기대 없이 시큰둥한 자세로 하루를 시작할 거다.
좋은 일이 생기든지 말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