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와인 한 병을 사 들고 지인의 작업실에 찾아갔다. 잘 지냈냐는 짧은 인사로 우리는 지난 삼 개월간 둘 사이 연락의 부재를 퉁쳤다. 알고 보니 우리는 그리 잘 지내지 못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이유로 자신의 무기력함을 너도 나도 뽐내기 시작했다. 서로의 무기력함을 듣고 있자니 ‘나도 나지만 넌 왜 그렇게 의기소침해져 있니, 정신 차리고 힘내’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고, 기력 있는 사람 하나 없이도 두 무기력이 붙으니 어쩐지 다시 무언가를 할 의지를 얻는 우리였다.
조금은 활력이 생긴 우리는 저녁을 배불리 먹었고 사 온 와인을 마시며 근황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요즘 글쓰기 모임을 나가고 있으며 이번 주제가 이상형인데 쓸 이야기가 별로 없다는 말을 했고 이는 자연스레 서로의 연애 이야기로 흘러갔다. 작년 우리는 서로 비슷한 시기에 애인과 헤어져 저번에 만났을 때도 사랑은 어렵다며 오그라들 법한 이야기도 제법 나눈 터였다. 헤어진 지 몇 개월은 지난 후였는데 우리는 아직도 그 시간에 미련을 흘려가며 머물러 있었다.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 조금, 사랑에 빠진 나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마음 조금, 마지막까지 애썼던 서로의 모습이 가여운 마음이 조금. 그렇게 다양한 감정들이 뒤섞여 그 엉킨 매듭을 아직까지 풀지도 잘라 버리지도 못하는 중이었다. 왜 그렇게 그 사람이 좋았을까 와인을 연거푸 들이키며 생각했다.
“나는 아무래도 자신의 신념이 확고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아.”
바로 전 연애 그리고 지난 연애들을 복기해가며 내린 결론이었다. 나는 나와는 다르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너무나도 정확히 아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남들이 다 가는 길을 용감하게 빠져나와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항상 힘 한번 못쓰고 반하고 만다. 이번에 헤어진 애인도 그랬다. 잘 다니던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이 바라던 길을 가기 위해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라면 그렇게 용기를 낼 수 없었을 텐데 그 모습이 대단해 보였고 그렇게 살고 싶다는 나의 바람이 대리만족을 넘어서 사랑의 감정으로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신기한 건 지인의 반응이었다. 자신을 좋아하던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지인은 자신의 글을 쓰며 자신의 길도 열심히 써 내려가고 있는 작가로 용기와 확신이 없어 반강제적으로 착실히 직장을 다니고 있는 나와는 확실히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깨달은 사람처럼 내 눈이 번쩍였다.
“그래서 내가 자꾸 너를 만나고 싶나 봐.”
그랬다. 그러고 보니 나의 지인은 만약 남자였다면 아마도 내가 고백을 하고도 남았을 법한 사람이었다. 대화가 잘 통하기도 통했지만 내가 끌리는 사람은 성별을 막론하고 나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곁에서 대리만족을 느끼거나 동경의 대상으로 함께 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겠지만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한편으로 그 모습이 좋으면 내가 그렇게 되면 될 터인데 안정적인 삶을 버릴 용기가 없어 나는 사랑에서도 비겁하게 상대방에게 나의 바람을 투영해 버리는 걸까 하고 조금은 부끄럽고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나에게 이상형이란 건 결국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