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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경 Oct 09. 2022

'귀종재흥' 당시의 지바씨 (1)

이노하나성과 오차노미즈, 지쇼-주에이 내란의 시작

* 이 글은 2021년 6월 26일 지바시(千葉市)에서 개최한 2021년도 지바씨(千葉氏) 공개 시민강좌 〈무가정권 성립기 동국 무사의 심성: '귀종' 요리토모와 지바 일족〉에서 김현경이 강연한 동명의 강연 내용을 한국어로 번역 및 일부 정리한 것입니다.


지금 소개를 받은 도쿄국립박물관의 김현경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강연의 테마는 「'귀종재흥(貴種再興)' 당시의 지바씨(千葉氏)」입니다. '귀종재흥'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등장할 때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노하나 공원의 지바현립 향토박물관

여러분들이 계시는 이 장소는 이노하나 공원(亥鼻公園) 안에 있는 향토박물관이며 이곳은 여러분들께 친숙한 장소라고 생각합니다만, 이 주변은 옛날에 지바씨가 본거지를 두고 있었다는 전승이 남아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꽤 오랫동안 지바씨의 저택이 있던 장소로 여겨져 왔습니다. 토루(土壘)나 해자, 초석 등이 확인되고 있고 오늘날에는 전국시대에 존재한 성터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공원 입구 부근에 있는 '오차노미즈(お茶の水)'라는 샘물이 있었다는 전승이 남아있는데 다음과 같은 안내판이 세워졌습니다. 조금 읽어보겠습니다.

옛날 지쇼(治承) 연간에 지바 쓰네타네(千葉常胤) 경(卿)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공(公)을 거성(居城) 이노하나산(猪鼻山)으로 맞이하였을 때, 이 물을 가지고 차를 바쳤다. 공은 이를 깊이 음미하였다고 전한다. 이후로 오차노미즈라고 불리며 성상(星霜) 8백 년 동안 맑은 물이 곤곤(滾滾)하여 지금도 마르지 않는다.


이에 따르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지바 쓰네타네의 거성으로 안내를 받았을 때 여기에서 길어올린 물을 사용한 차를 대접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1147~1199): 일본의 무장으로 최초의 무사 정권인 가마쿠라 막부를 수립한 인물.


이노하나 공원은 이노하나성과 오차노미즈라는 전승지가 남아 있는 장소인데, 이는 지바씨와 요리토모와의 관계에 관한 어떤 기억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안내문에 나오는 '옛날 지쇼 연간'이라는 말도 그렇습니다만, 역시 그것은 요리토모가 헤이케(平家)를 타도하는 기치를 들어올린 거병에 대한 기억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헤이케: 12세기 중엽에 무장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조정에서의 실권을 장악하고 형성한 권문(權門)을 가리키는 명칭. 기요모리와 그 일족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면 이제 요리토모의 거병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하기 직전에 '지쇼(治承)-주에이(壽永)의 난' 또는 '지쇼-주에이 내란', 일반적으로는 '겐페이 합전(源平合戰)'이라고 불리는 전쟁이 일었나는데요, 그 전쟁의 시작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지쇼 3년(1179),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에 의해 조정 안에서 쿠데타가 발발하고 맙니다. 이때 고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은 유폐되었고 다양한 정치적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 가운데 고시라카와 법황의 황자였던 모치히토왕(以仁王)이 영지를 몰수당하는 등의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듬해, 모치히토왕은 미나모토노 요리마사(源賴政)라는 인물과 함께 거병하여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하지만 그때 모치히토왕은 헤이케 타도의 영지(令旨)를 여러 지방의 겐지(源氏)들에게 발령하였고, 그것이 지쇼 4년(1180) 4월에 요리토모에게도 도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요리토모는 헤이케 타도를 결심하고 같은 해 8월에는 거병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미우라(三浦) 일족에게도 요리토모가 참가를 제안하였습니다.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 적힌 내용을 중심으로, 미우라씨가 어떤 행동을 취하였는지를 살짝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아즈마카가미: 가마쿠라시대 후기에 성립된 편년체 역사책으로,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부터 6대 쇼군까지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그보다 앞서 거병 2개월 전인 지쇼 4년 6월, 미우라 요시즈미(三浦義澄), 이 사람은 미우라 일족인데요, 요시즈미가 수도인 교토(京都)에서 돌아와 이즈국(伊豆國) 호조(北條)로 와서 거기 있던 요리토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요시즈미는 원래 교토에서 경비를 담당하는 직무인 반야쿠(番役)를 수행하기 위해 교토에 체재하고 있었는데, 돌아올 때 호조 땅에 들러 요리토모를 만났던 것인데요, 이때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거병과 관련하여 약간의 정보를 건넸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8월 17일에는 요리토모 일당이 이즈국의 모쿠다이(目代)였던 야마키 가네타카(山木兼隆)를 습격함으로써 거병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한편, 미우라 요시아키(三浦義明, 요시즈미의 아버지) 일족은 그 거병에 참가하려고 마음먹고 이것저것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미우라반도와 이즈반도 사이에 바다가 가로막고 있어 먼 길이었기 때문에 늦고 맙니다. 그 후 요리토모는 자신의 군세가 다 모이지 않은 가운데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사가미국(相模國) 도이향(土肥鄕)에 들어갔고, 22일에는 미우라의 군세가 미우라 땅을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23일에는 요리토모가 이시바시산(石橋山)이라는 곳에서 헤이케 측 군대와 싸워 패배하고 맙니다. 미우라의 군세는 지금의 가나가와현 남서부에 해당하는 마리코강[丸子川]에 도착해 있었지만, 결국 제때에 도착하지 못하였으므로 미우라 땅으로 퇴각하게 됩니다.


그 돌아가는 길에 하타케야마 시게타다(畠山重忠)라는 인물과 충돌하여 유이(由比)라는 곳에서 교전합니다. 이것이 유이가하마(由比ヶ濱) 전투입니다. 시게타다는 이 전투에서 패퇴합니다. 하지만 이튿날인 26일에 시게타다는 일족과 주변 무사들을 이끌고 와서 헤이케의 은혜에 보답하고 유이가하마의 치욕을 씻기 위해 미우라를 습격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미우라 요시즈미 등은 기누가사성(衣笠城, 지금의 요코스카시)에서 농성하는 궁지에 몰리고 맙니다.


그 때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즈마카가미』 지쇼 4년(1180) 8월 26일조 기사에 적혀 있습니다.


요시즈미 등은 싸웠지만 어제와 오늘 이틀간의 전투로 힘이 다하고 화살이 떨어졌다. 반경(半更)이 되어 성을 버리고 도망치면서 요시아키를 데려가려고 하였다.


요시즈미는 지쳐서 싸움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자 성을 버리고 도망치려고 했던 것인데, 그때 아버지 요시아키도 함께 데려가려고 생각했습니다. 요시아키는 이 순간 '나는 겐케(源家)를 대대로 섬긴 가인(家人)으로서 다행히 그 귀종재흥의 때를 만났다. 어찌 이를 기뻐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며, 자신은 이제 89세가 되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남은 목숨을 요리토모를 위해 던지고 자손의 훈공을 쌓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며 자신은 성에 남겠다는 선택을 합니다. 이를 들은 요시즈미는 울면서 결국 아버지의 명에 따라 아버지를 놔두고 퇴각하게 됩니다. 그 다음 날에 요시아키는 가와고에 시게요리(河越重賴), 에도 시게나가(江戶重長) 등에 의해 살해되고 맙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요시아키의 멘트, '겐케를 대대로 섬긴 가인으로서 다행히 그 귀종재흥의 때를 만났다'는 문장은 꽤 유명한 대사라서, 요리토모의 귀종성(貴種性)이라든가 거병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자주 인용되는 문장입니다. 이를 보면 요리토모의 거병을 요시아키는 귀종(貴種)이 부흥하는 기회로 생각하였고, 자신의 집안은 여러 대에 걸쳐 미나모토 가문에 봉사해 온 사람들임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요리토모에 대하여 가인들은 어떤 인식을 갖고 있었을까요?


- 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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