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에 간행된 『경주이씨세보』의 백사공파 계보를 보면 대한제국 때 판사직을 지내다가 물러나 변호사로 활동한 이진우(李珍雨, 1883~1932)의 이름이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이진우의 부인인 창녕 성씨의 이름도 나온다. 창녕 성씨는 성영돈(成永敦)의 딸로 신사년, 즉 1881년에 태어났다고 하니 이진우보다 두 살 많은 것이 된다. 2006년에 발행된 『경주이씨백사공파보』에는 성씨의 이름이 만가(萬家)라고 되어 있다. 다만, 생년이 '신유 1981년', 몰년이 '신사 1941년'으로 되어 있는데, 생몰년이 뒤바뀌었다고 추정해 본다면 성씨는 신사년(1881)에 태어나 신유년(1921)에 사망한 것이 된다. 한편 1978년에 간행된 여재규의 『하동군사』에서는 이진우의 처가 온양 방씨인 방만가(方万佳)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동생인 건축가 이훈우(1886~1935)의 아내 방만리(方萬里)와 성만가라는 이름이 혼선을 빚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후로 이진우의 부인 성씨를 성만가라고 부르기로 한다.
경주이씨세보에 보이는 이진우와 성만가
창녕 성씨 대종회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인터넷 족보에서 성만가의 아버지 영돈의 이름을 검색하면 중랑장공파에 속한 인물이 확인된다. 그는 1855년에 태어나 1927년에 사망하였고, 족보에 따르면 슬하에 아들 낙신(樂信)과 딸 두 명이 있었다. 딸 한 명은 김기채(金箕采)라는 사람과, 다른 딸 한 명은 정화종(鄭和鍾)이라는 인물과 결혼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영돈의 딸과 결혼하였다고 하는 이진우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인터넷 족보 상으로는, 영돈의 아버지 성선호(成善鎬)에게 영돈을 포함하여 3남 2녀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첫째 아들은 영돈, 둘째 아들은 영래(永徠), 셋째 아들은 영교(永敎)이며, 첫째 딸은 정성호(鄭成鎬)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의 남편 이름은 이조우(李灶雨)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이조우라는 이름이 뭔가 수상해 보이지 않는가? 이조우에 대해서는 그가 경주인, 즉 본관이 경주 이씨인 사람이며, 그의 아버지가 주사(主事) 직을 지낸 이종훈(李鍾薰)이라고 적혀 있다. 단, 이진우의 본관이 경주이기는 하지만 이진우의 아버지 이름은 이종구(李鍾龜)이기 때문에 일치하지 않는다.
또 하나 수상해 보이는 것은 바로 이조우의 '조(灶)'라는 한자이다. 灶는 부엌 조(竈)와 통하는 글자로, 사람 이름에 쓰기에는 뜻이 이상해 보인다. 물론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특이한 이름을 쓰는 사람도 분명히 있기 때문에 한자가 이상하다는 것만 가지고 트집을 잡을 수는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진우는 아니더라도 뭔가 다른 글자가 잘못 적혀서 灶가 된 것이 아닐까 상상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가령 壯이라든지 하는 글자가 족보 편찬이나 필사 과정에서 잘못 옮겨졌을 가능성 말이다.
그래서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창녕 성씨 낭장공파보』(을축보, 1989년 간행)를 열람하였다. 해당 부분을 확인해 보니 창녕 성씨의 인터넷 족보와 전혀 틀림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진우의 아내 성만가는 족보에 기재되어 있지 않았거나 다른 성영돈의 딸이었던 것일까?
창녕 성씨 낭장공파보(을축보)의 '이조우'
그러던 중 『창녕 성씨 낭장공파보』에 수록된 성선호, 즉 족보 상 이조우의 장인에 대한 기록을 보았더니 다음과 같이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자(字)는 규서(奎瑞). 호(號)는 균파(筠坡). 순조 서기 1837년 정유 정월 10일 생.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깊었다. 어버이가 병들자 (피를 먹이기 위해) 손가락을 쨌고, 형을 섬기기를 아버지처럼 하였다. (선호가 사망하니) 멀고 가까운 곳의 사우(士友)들이 애석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김기봉(金箕鳳), 권인구(權仁求)가 행장(行狀)을 지은 것이 세덕록(世德錄)에 보인다.
성선호의 행장(行狀), 즉 죽은 이의 일생동안의 행적을 적은 글이 세덕록에 실려 있다는 것이다. 그 글에는 성선호의 자식과 사위에 대한 정보도 당연히 들어있을 터였다. 마침 『창녕 성씨 낭장공파보』가 1989년에 간행되면서 그 부록으로 『창녕 성씨 문헌지(文獻誌)』도 발간되었는데, 그 중에는 고종 37년 경자(1900)에 권인구가 썼다는 행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창녕 성씨 문헌지』를 열람해 보니 행장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보였다.
공(성선호)은 진양 정씨 석정공 홍조의 8세손 지성(志晟)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이 또한 진주의 명가(名家)이다. (정씨와의 사이에서)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다. 아들은 영돈, 영래, 영교이다. 딸은 진양 정씨 성호에게 시집갔다. 영돈에게는 아들 하나와 딸 둘이 있고, 영래에게는 아들 둘과 딸 둘이 있으며, 영교에게는 아들 하나가 있고, 정성호는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公配晉陽鄭氏石亭公弘祚之八世孫志晟之女, 亦晉之名家也. 生三男一女. 男曰永敦·永徠·永敎. 女適晉陽鄭成鎬. 永敦有一男二女, 永徠有二男二女, 永敎有一男, 鄭成鎬生一男二女, 皆幼.
행장의 기록과 족보의 기재를 대조해 보면 흥미로운 차이가 나타난다. 행장에서는 성선호에게 3남(영돈, 영래, 영교) 1녀(정성호와 결혼)가 있다고 했는데, 족보에는 3남(영돈, 영래, 영교) 2녀(정성호와 결혼, 이조우와 결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조우와 결혼한 여성은 성선호의 딸이 아니라 성영돈의 딸이며, 더 나아가『경주이씨세보』에 나오는 이진우의 아내와 동일인물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성영돈 슬하의 1남 2녀는 행장과 족보 기록이 일치하여, 이조우와 결혼한 1녀가 들어갈 여지가 없다.
대신 성영돈의 동생 영래의 경우, 행장에서는 2남 2녀, 족보에서는 3남으로 자녀 정보가 다르다. 단, 3남 중 셋째인 낙석(樂石)은 1900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권인구가 행장을 쓴 1900년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거나 갓 태어나서 기록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족보에 보이지 않는 2녀 중 한 명이 이조우의 부인이지는 않을까? 다만 그럴 경우 '영돈의 딸'과 결혼한 이진우와 연관짓기는 조금 곤란해 진다.
사실 1989년 이전에 제작된 『창녕 성씨 낭장공파보』도 존재하는 것이 『창녕 성씨 문헌지』를 통해 확인된다. 1900년에 간행된 경자보와 1964년에 간행된 갑진보가 그것이다. 이들 족보에는 이조우와 결혼한 딸의 기록이 좀더 정확하게 적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아쉽게도 현재 도서관 등에서 소장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없다.
* 추기(2023/7/17): 창녕성씨대종회의 협조를 구하여 1900년 경자보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1989년의 족보와 내용이 일치한다. 단, 이조우와 결혼한 딸이 서녀로 되어 있어, 권인구가 쓴 행장에 딸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또한 이전 족보에서도 이'조'우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름의 오류는 없다고 보아야 하겠다.
그렇다면 이대로 이조우와 이진우의 동일인물설은 증거 불충분이 되고 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조우의 아버지가 주사 이종훈이라는 기록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주사라는 관직에 주목해 보면 이진우의 아버지 이종구는 무자년(1888)에 광무국 주사를 지냈다는 것이 묘갈명에 기재되어 있어 역시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추가된다. 그리고 이진우의 형 이은우(李恩雨, 1881~1942)의 원래 이름이 형우(亨雨)였다가 1907년 10월 무렵에 은우로 개명한 것(「1900년대 재일본 한국유학생의 활동과 그 배경: 이은우·이진우 형제를 중심으로」 참조)이 알려져 있는데, 이형우(이은우)가 개성학교에 다니고 있던 1904년, 그의 아버지 이름이 이종훈(李鍾薰)이었음도 개성학교 교장 아라나미 헤이지로(荒浪平治郞)의 글에서 최근 발견하였다. 다시 말해 이은우와 이진우의 아버지 이름이 원래는 이종훈이었다가 1904년 이후의 어느 시점에 이종구로 개명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이종훈이라는 이름을 승정원일기에서 검색해 보면 1889년에 광무국 주사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1년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광무국이라는 관청까지 일치한다. 주사 종훈을 아버지로 두고 창녕 성씨 여성과 혼인한 이조우는 광무국 주사 이종훈=이종구의 둘째 아들로 역시 창녕 성씨인 성만가와 결혼한 이진우와 동일인물이라고 보는 것은 과연 무리한 추정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