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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은 Feb 26. 2022

'분홍분홍'에 대한 생각


 꽃무늬나 하늘하늘한 레이스가 달린 옷을 사 본 적이 없다. 내 옷은 대부분 면으로 된 회색, 검은색, 갈색이다. 옷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얘기도 되고 더 정직하게 말하면 색을 맞춰 근사하게 옷을 입는데 소질도. 좀 더 발전하고 싶다는 의지도 없이 게으르다는 증거가 되겠다. (면 옷이 아니면 몸이 간지럽기도 하다)


 그래서 결혼할 무렵부터 시어머니는 날 무척 불만스러워하셨다. 본인 표현대로 '돈이 없어 못 하지' 예쁜 물건, 비싼 물건에 대한 욕심이 많으셨던 시어머닌 젊은것이 맨날 우중충한 색을 입고 다닌다고 아주 못 마땅해하셨다. 결혼 초 어느 날엔 우리 집에 오셔서 같이 장 보러 나갔다가 시장 옷가게서 파는 노란색에 프릴이 달린 실내복을 사셨다. 집에 와 내게 입혀놓고 남편이랑 둘이 '얼마나 이쁘노, 얼굴이 다 확 사네' 하시는데 무슨 종이 인형이 된 양, 마음이 몹시 불편했던 기억도 있다.  친정엄마도 마찬가지. 난 길거리서 엄마를 보게 되면 슬슬 뒷걸음질 쳐 다른 길로 간다. (우린 한 아파트 앞뒷동에 살아 자주 마주친다) 엄마가 싫어서 라기보다는 얼굴 보자마자 '꼴이 그게 뭐냐'할 게 뻔해서. 엄마에게 우중충한 옷은 다 '꼴' 같잖은 것이다. 동네 시장 가는데 누가 외출복을 갖춰 입고 화장을 하냔 말이다. (울 엄만 하신다. 최소한 립스틱이라도 바르신다, 에휴)


 작년엔 집 근처 쇼핑몰 옷 가게 앞을 지나다 짙은 감색이지만 살짝 하늘하늘한 천의 블라우스가 참 예뻐 보여 입어 본 적이 있었다. 탈의실에서 나와 거울 앞에 서니 거기 비친 그 옷을 입은 내 모습이 어찌나 우스꽝스럽던지 나도 모르게 깔깔대며 웃었다. 뒤에서 같이 거울을 들여다보던 주인아주머니는 잘 어울린다는 흔한 거짓말 대신 이런 스타일 옷을 안 입어 봐 그렇다는 바른 소리도 하셨다. 그래도 차려입어야 할 자리에 단정하게 입고 나간다고 생각하며 그저 나 생긴 게 이러려니 하고 살고 있다.


 연초 멀리 사는 친구에게 선물을 받았다. 뭘 보냈는지는 이미 귀띔을 받아 알고 있었는데 열어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호주 사는 친구가 그곳에서 유명한 좋은 양털 슬리퍼를 보내줬는데 그게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있던 것과 너무 달랐다. 바로 이것.



 난 오른편에 있는 갈색 슬리퍼가 올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남편 것이었고 내 것은 저렇게 분홍분홍 하고 앙증맞은 것, 로코코 풍 명화를 보면 양간하게 생긴 귀부인이 걸으려고 가 아니고 장식용으로 발끝에 걸치고 있는 것 같이 생긴 슬리퍼라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이걸 어찌 나보고 신으라고, 내 취향도 어지간히 아는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이걸 보냈지? 하고. 


 그렇지만 어쩌랴, 친구의 고마운 성의가 있는데. 게다가 난 발이 항상 차가워 한여름에도 양말 신세를 지는 형편이니 보기만 해도 따뜻해지는 저 슬리퍼를 마다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신고 있지만 볼 때마다 실실 웃음이 났다.


그런데 며칠 전 친정에서 막내네를 만났다. 유럽에 갔다 온 조카가 선물을 사 왔는데 영세만 받고 성당에 안 나가는 녀석이 신통하게 바티칸 정식 성물 판매소에서 사 왔다며 묵주를 꺼내놨다. 성물 판매소에서 교황님이 축성하신 거라 했다는데 진짠지는 모르겠다 하길래 우린 성물을 실은 트럭에 축성하신 거다, 아니 성물 판매소 앞에서 하신 거다, 아니 그냥 했다친 건 아닐까 하고 우스개를 해가며 구경을 했다. 할머니 즉 나의 엄마에게 먼저 고르시라며 묵주 셋을 보여 드렸는데 하나는 하얀색, 하나는 나뭇색, 마지막 하나는 그야말로 알록달록, 중국풍이 나는 화려한 묵주였다. 당연 엄마가 제일 화려한 걸 잡으시겠지 했는데 웬일로 이렇게 예쁜 건 젊은 애들이 하고 난 하얀 걸로 할랜다 하셨다. 다음으로 내 차례가 왔는데 얼라,  빨간색 초록색이 점점이 박힌 묵주가 내 눈에 딱 들어왔다. 이럴 수가! 


 평소대로라면 당연히 나뭇색 묵주를 망설임 없이 잡았을 텐데 그건 어찌 생겼는지 지금도 기억이 안 나고 무겁기도 화려하기도 한 묵주가 먼저 손에 잡혔다. '와, 참 예쁘다' 했더니 조카 녀석이 얼른 '고모, 그거 고모 가지세요' 한다. '너 여자 친구도 천주교 신자라며, 걔 갖다 줘' 하니까 손사래를 치면서 '걔는 괜찮아요, 그건 고모가 가지세요'한다. 그래서 가졌다. 


저 작은 묵주알에 박힌 무늬가 다 다르다

 

 집에 와서 묵주를 찬찬히 만져보며 참 희한하다 생각했다. 왜 이 묵주가 눈에 딱 들어온 걸까? 내 취향이 전혀 아닌데~~ 그러다 문득 분홍분홍한 슬리퍼가 떠올랐다. 아~~ 그랬구나, 정말 그렇구나.


 전혀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분홍분홍 그 색이 공연히 기분을 즐겁게 했고 그게 내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저 알록달록 묵주에도 눈길이 갔구나. 사소했지만 안 가져본 변화가 나를 아주 조금 바꿔버린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이제 나도 늙어 화려한 것에 마음이 가기 시작한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제 친정에 들른 길에 엄마가 너 잘 왔다 하면서 꺼내 놓은 빨간 바지에 기겁을 하고 도망 나온 걸 생각하면 후자보다는 전자에 더 신빙성이 있다.ㅎㅎㅎ(그러고 보니 두터운 외투를 벗기는데는 차갑고 사나운 바람보다 따뜻한 햇살이 훨씬 효과가 있는게 확실하다)


 조금씩 다르게 살아보는 것도 좋겠다. 한 방향으로 오래오래 살아왔으니 살짝 방향을 틀어 보지 뭐. 이런 생각을 하며 글을 쓰다 아래를 내려다보고 나는 또 실실 웃는다. 

맨발로 신으면 더 따뜻해 

 


덧,

조카가 오르세에서 찍어 보내준 고흐의 그림

 원본보다야 조금 못하지만 직접 본거랑 제일 비슷한 사진이다. 구글 이미지에서 아무리 찾아도 이 만큼 빛나는 느낌이 잘 살린 사진을 찾을 수 없었다. 반짝반짝 별이 빛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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