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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브 Aug 14. 2018

#9. 워킹맘은 직장에서, 시터님께, 아이에게도 죄인

어느 누구도 나를 비난하지 않았지만 나는 왜 이렇게 미안한걸까?




독박육아하는 워킹맘은 직장에서 죄인이다.


 서울가 1시간가량 떨어진 지역의 업체와 미팅 및 저녁식사 일정이 생겼다. 남편이 없기에 평소에는 일 끝나면 집에 바로바로 들어가지만, 이런 특별한 날에는 아이를 하원시켜주는 시터이모님께 양해를 구하고 좀 늦게 들어간다.


 저녁을 먹다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졌다. 아뿔싸, 같이 오신 분들은 막차를 타고 갈 생각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그러면 안되는데... 초조해서 그런지, 아니면 갑자기 기름진 음식과 술을 먹어서 그런지 멀쩡하더 속이 뒤집어졌다. 뜬금없이 배가 부글부글리고 속이 안좋고 화장실을 들락날락 해야했다. 


 더이상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실수가 없었다. 최대한 눈치보며 술을 피했지만 미팅업체 사장님은 나에게 오늘따라 술을 안먹는다고 물어보셨다. 어쩌겠는가, 솔직하게 지금 배가 갑자기 아파서 못먹는다고 했다. 분위기가 살짝 싸해졌다. 팀장님의 얼굴도 좋아보이지 않아서 영 눈치가 보였다. 그러나 엄살이 아니라 설사를 물처럼 하고 속이 막힌 느낌이라서 먹을 수가 없었다. 결국 미팅업체 사원이 나를 데리고 약국으로 데려가주었다.  집에 가고 싶다. 타지에서 아프니까 돌아갈 길이 더 걱정이 되었다. 


"너 진짜 아프구나." 약국에 다녀오니 사람들이 비로소 내가 진짜 아프다는걸 알아주셨다. 그 전에는 그냥 술먹기 싫어서 빼는줄 아신 듯 하다. 시간은 어느덧 9시를 훌쩍 넘었다. 아프니까 너는 그만 집에 들어가라고 해주길 바랬다. 여기서 더 늦어지면 집에서 기다리고 계실 시터이모님도 너무 걱정이 되고 미안했다. 나의 그런 소망과 달리 나온 말,  "2차 갑시다!"


 2차까지 가니 시간이 너무 늦어졌다. 다음 기차를 타야 적어도 밤 12시 안으론 집에 갈 것 같아서 앞에 계신 다른 상사분께 슬쩍 얘기했다. 그러나 안 갈 분위기다.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사정을 말했다.


"이모님이 집에서 기다리고 계셔서 교대를 해줘야합니다, 지금 안가면 새벽 1시 넘어서 도착할 것 같아요."

"새벽 1시면 많이 늦니? 그러면 지금 나가야하는데?"

(근데 너가 지금 갑자기 나가면 자리 파토나거나 분위기 별로 안좋아질테니까 그냥 있는게 낫지않을까)


 결국 나는 시터이모님께 전화해서 새벽1시쯤에 들어갈 것 같다고, 생각보다 너무 늦어져서 죄송하다고 계속 사죄를 했다.


 다행히 2차에선 아픈 나에게는 술을 권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내가 평소에 술을 어느정도 먹고 나름 분위기를 띄웠던 스타일이기 때문에 업체사장님은 내가 아파서 아쉬워하셨다. 죄송스러웠다. 나 하나로 인해서, 하필 내가 아파서, 내가 집에 들어가봐야한다며 걱정을 해서, 친목도모하는 자리가 조금 망쳐진 것 같았다. 회사의 입장에서 보면 오늘 나는 적절하게 내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독박육아하는 워킹맘은 시터이모님께 죄인이다.

 나에게는 그나마 독박육아를 조금이나 덜어주는 하원 시터이모님이 계신다. 우리와 이모님과의 관계는 매우 돈독하다. 신생아때부터 봐주신 분이라 어린이집을 보내서 일 시간이 훨씬 줄었지만 월급은 다 보존해주었고, 대신 이모님께서는 나에게 갑작스런 회식이나 출장 등이 발생하면 더 봐주시곤 하셨다. 주 양육자인 남편의 부재를 종종 이렇게 채워주셨다.


 이번에도 미팅때문에  2~3시간정도 늦을것으로 예상하고 미리 양해를 구했었다. 그런데 저녁식사 자리에 가보니 이 자리는 빨리 끝날 자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먼저 보내줄 분위기도 아니다.


 어쩔수 없이 밤 9시가 넘은 시간, 이모님께 전화해서 새벽1시쯤에 도착한다고 부탁드렸다. 생각지도 않은 어마어마한 야근이 발생한 것이다. 이모님도 내가 어쩔수 없는 상황인걸 아셔서 별말안하시고 받아들이셨지만, 너무나 내가 죄송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차라리 미리 말했으면 이모님 댁에 데려가시거나 다른 조취를 취했을텐데... 새벽한시까지 연장근무에 정말 너무 죄송하고, 이렇게 전전긍긍하는 내 모습때문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새벽1시가 조금 넘어서 도착했다. 이모님은 졸려서 부스스한 모습으로 맞아주셨다. ATM기도 운영하지 않아서 잠깐 기다리라고 한 뒤 계좌로 오늘 야근수당을 넣어드렸다. 평소엔 드리지 않아도 되지만 이번만큼은 너무 오랜시간동안 연장근무를 하셔서 죄송한 마음에 챙겨드렸다. 엄마가 언제오나 걱정하실 이모님의 자제분들께도 죄송스러웠다. 물론 나와 나이가 비슷한 성인이지만 갑자기 야근이 발생한 엄마를 기다리는 마음은 우리 아이나, 시터이모님의 자제분들이나 비슷할테니까.  




독박육아 워킹맘은 아이에게 죄인이다.


 이모님이 아들에게 물었다.


 "oo야, 할미(시터이모님)집가서 잘래?"

 "아니야 아니야 엄마집!"

 "그럼 할미랑 코코넨네할까?"

 "할미 아니야 엄마"


 그러곤 잠을 자지않고 짜증을 많이 내서 결국은 유모차에 태워 한바퀴 산책을하니, 아들은 눈이 가물가물해져서 잠이 들었다곤 한다.


 엄마랑 와서 자기랑 같이 자기를 기다린걸까, 그러고보니 오늘은 아이와 함께 보낸 시간은 고작 아침시간 1시간 정도이다. 아빠도 매일 못보는데 오늘은 엄마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잠들었다.


 누워서 잠든 아이의 모습을 보니 갑자기  짠해지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엄마가 미안해,"



 이렇게 나는 오늘 직장과 육아 사이에서 둘 다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피해만 끼친 죄인이 되었다.



 




에필로그


"시터이모님이 본인 댁으로 아기 데려가거 아니었어? 그럼 나한테 말하고 조용히 가보지 그랬어 왜 그냥 있었니?"

 팀장님은 나랑 떨어진 자리에 계셔서,  내가 아프다는 것도 술을 먹기 싫어서 그런줄 오해하셨고, 종종 이런날엔 시터이모님이 아이를 본인댁으로 아예 데려가다 보니 오늘은 아이로부터 자유로운 날인줄 아셨다. 좀 멀리있어도 카톡으로 팀장님께 얘기할 껄, 멍청하게도 팀장님이 아닌 내 앞에 계신 다른 상사분께 얘기해서 나는 집에 못간 것이다.  



"뭐 이런날도 있을 수 있지, 나도 8월말에 휴가가니까 그 생각으로 봐준거야."

 시터이모님도 (말로만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괜찮다고 하셨다. 본인이 8월말에 휴가도 가고, 8월초에 아기 방학이라 이모님에게도 일주일간 유급 휴가를 주었기 때문에 그 댓가라고 생각하고 봐주셨다고 한다. 이번 상황에 대해서 전혀 나쁘게 받아들이시지 않으셨다.



"엄마 잘잤어?"

 우리 아들은 엄마 없이 잠들었는데도 딥슬립을 했다. 그 전날에는 새벽 3~5시 동안 계속 깨고 울고 짜증내는 바람에 아들도, 나도 많이 힘들었는데, 오늘은 엄마가 재워준것도 아닌데도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자고 기분좋게 일어났다. 가끔 내가 없어도 생각보다 씩씩하게 잘 성장하고 있는 아들인데, 나만 괜히 가슴아파한 것 같다.



 정말 이 날 나는 직장에서, 시터님께, 우리아들에게 죄인이었을까? 아니면 스스로가 낮은 자존감과 무거운 의무감 때문에 스스로 죄인의 굴레를 씌운걸까? 독박육아를 하는 워킹맘을 죄인으로 보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면 내가 스스로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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