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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로 Nov 15. 2023

우렁각시 말고 우렁신랑

깜짝이야

연말이 되자 회사일이 심각하게 바빠졌다.

들어가서 씻지도 못하고 온 방에 불을 켜놓고

그대로 침대에서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이런 사정이니 우리가 만나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역시 추워진 날씨에도 패딩을 껴입고 우리 집 앞으로 왔다.

하필 그날은 영하로 떨어진다고 일기예보가 나와있던 날이다.


여전히 그는 우리 집 앞이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일을 해야 하는데, 그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퍽 불편해졌다.

결국 집의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들어가서 기다리라고.


그는 괜찮다고 연신 거절을 하더니

결국 추웠는지 '실례합니다' 하고 나의 집에 입성하였다.

사실 나는 마음이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를 밖에서 만났기 때문에 집을 치울 필요가 없었다.

정확히는 집을 치울 체력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일주일째 쌓여있는 설거지와 빨래가 생각났다.

이부자리도 넓러 놓고 온 것이 생각났다.

아, 나도 도무지 모르겠다.

너무 피곤한 탓에 감정에 에너지 소모를 할 수 없었고

그와 싸움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약간은 자포자기.


회사 일을 끝내고 걱정반 설렘반 불안함 1% 정도를 가지고

도어에 비밀번호를 렀다.



띠띠띠띠.. 띠 띠로리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네,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빨리 오고 싶더라고요."

"어라, 이게 다 뭐죠?"

"아, 힘드실까 봐 좀 해봤어요."



정말

헉 소리가 났다.



집에 들어왔더니 보일러도 훈훈하게 틀어놨고

빨래대에 빨래가 좋은 향기를 퐁퐁 뿜었다.

싱크대는 원래 이렇게 빛이 났던가 싶게 빤짝거렸다.

나의 식기들은 선반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고,

이제야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닥은 머리카락 한올 없이 깨끗했다.

빙판장에서 스케이팅을 타면 이런 느낌일까.

넘쳐있던 쓰레기통은 텅텅 비었다. 깔끔.


당황스러워하며 서있는 나에게 다가와 포옹을 해주었다.

역시 그는 포옹성애자였다.



"집에 들어왔는데 해야 할게 많더라고요?"

"이번주에 너무 바빴어요, 내심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 정도면 이 집에 제 몫은 한 것 같아요."

"그러네요. 먹고 싶은 것 있나요? 야식 먹고 가세요."

"음, 맛있는 걸로 골라야겠다."



남자친구에게 이런 식으로 집을 초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기념일이 되면

와인과 직접 한 파스타를 차려놓고 분위기를 한껏 부린 다음

초대를 하고 싶었다.

연말이니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나에게 아주 냉혹했다.


'네가 생각하는 것은 아주 드라마 같은 환상이란다^^

야근이나 하렴. 아침에 눈이라도 뜨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렴.'


세상이 야속했다.

무작정 찾아오는 남자친구도 야속했다.

결국 내가 포기하고 그를 집으로 들였다.

그랬더니 우렁각시

아니 우렁신랑이 되어 집안일을 해주었다.


그는 이렇게 종종 우리 집에 와서 집안을 해놓고 갔다.

내가 다음연도에 한가해질 때까지.

덕분에 우리는 야식 메이트가 되었고

본의 아니게 뭐랄까 따듯한(?) 매우 현실적인 연말을 보내게 되었다.



지금도 우렁신랑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안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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