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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로 Dec 04. 2023

유부녀의 해방일지(1)

남편이 없는 사이 

남편은 몇 주 전부터 군대동기들과 함께 1박 2일로 여행을 간다고 했다. 군대 후임들과 각별한 사이인지라 평상시에도 전화와 연락을 자주 한다. 물론 세월이 더 지나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아직까지는 전우애 같은 것이 남아 있는지, 그들과 친하게 지낸다. 간간히 이야기를 들어서 어떤 사람들인지는 대충 파악하고 있다.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마음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주말에 겨우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데, 놀러를 간다고 하니 조금은 서운했다. 그러나 남편에게도 그만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의 인간관계도 중요하니 기쁜 마음으로 보내주기로 했다.




막상 남편이 놀러 가는 날이 되니 약간 들떴다. 세상에나 은근히 나도 신나는 기분마저 드는 게 아닌가. 남편에게는 연락은 안 해도 되니 술만 조금 마시라고 당부해 주었다. 그렇게 남편이 떠나고 나는 갑자기 자유부인이 되었다. 이 얼마만인가. 나도 모르는 사이 나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건가. 급 해방감을 느꼈다. 이래서 남편들이 아내가 친정을 간다고 하면 좋아하는 건가. 인터넷에 남편들의 후기를 보면 대부분 이러하다.


"아내가 오늘 친정을 간다고 했다. 아내에게 무척 아쉬운 표정을 짓고, 얼른 오라고 이야기를 해준다. 그리고는 속으로 푹 쉬고 와도 돼 라고 외친다. 유부남 친구들 단톡방에 게임 소집을 한다. '오늘 와이프 친정 감.' 저 문구를 본 친구들이 부럽다고 다들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는 컴퓨터를 켜고 신나게 게임을 한 뒤 저녁에는 프리미어리그를 틀어놓고 치맥을 때린다. 오래간만에 밤샘을 달려야겠다."


세상에 나는 갑자기 우리나라 남편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그동안 서로 맞춰 살면서 싫어하는 짓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아웅다웅 살고 있었는 우리. 우리는 멋진 바지 핏이나 패션을 위해 벨트를 한다. 나의 숨을 들이마시고 참는 다음 버클을 힘껏 안쪽으로 당겨 구멍에 넣는다. 벨트와 함께 옷맵시를 다듬는다. 부부도 멋진 삶을 위해 서로 숨을 들이마시고 참아 함께 구멍을 통과하는 과정을 거쳐 살고 있다. 그러나 남편이 군대동기들과 여행을 갔을 때는 아주 잠깐 배를 누르고 있었던 벨트를 풀었던 것이다. 벨트를 풀면 복부의 온갖 장기가 제자리로 돌아가 혈액순환이 된다. 들이마셨던 공기를 폐를 통해 후하고 내쉬는 느낌으로 평온해진다. 그렇게 벨트를 풀었을 때의 해방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남편이 간 뒤로는 뭘 할까 생각했다. 우선 나는 일어나자마자 뭘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늘 남편은 아침에 배고파했기 때문에 억지로 아침을 먹어야 했다. 아침을 뭘 먹어야 하는지 생각하는 일은 늘 스트레스였다. 그럼 남편이 아침을 알아서 먹게 놔두면 안되냐고? 왜 안 해봤겠는가. 그랬더니 맨밥만 먹기도 하고, 라면을 혼자 끓여 먹기도 했다. 그렇다. 이 남자 요리라는 것을 못한다. 안 해본 것이 아니라 못한다. 나에게 서프라이즈라고 요리라도 하나 해줄라치면 거의 1시간 반이 걸린다. 요리 기다리다가 배곯아 죽는다. 사정이 이러하니 신경이 쓰이는 내가 해야지 어쩌겠는가.


일어나자마자 내가 먹고 싶을 때 음식을 먹겠노라 생각했다. 푸룬주스를 한잔 거하게 마시고, 2시쯤에 간장계란밥을 간소하게 만들어 먹었다. 먹고 정리하다 보니 어느덧 3시가 되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하루가 갈 수 없다. 추운 겨울바람에 옷을 단디입고, 길을 나섰다. 오늘은 뭔가 신이 나기 때문에 발걸음도 가볍다. 나가자마자 그동안 모아 온 비상금을 통장에 조용히 넣었다. 이런 건 남편이 없을 때 해야지. 쫌쫌따리 현금으로 모아둔 나의 소중하고 소중한 비상금이다. 주변 은행의 ATM에 입금하는 순간 나의 통장에 겨울 보너스를 넣어준 것이 뿌듯해졌다.




그리고는 룰루랄라 길을 나섰다. 두 번째로 들린 곳은 다이소였다. 요즘 'VT 니들샷'이라는 화장품이 그렇게 유명하고 한다. 바르면 따끔거리는데 피부의 미세한 바늘을 내어주고 다음 스킨케어성분을 잘 먹게 해주는 강력한 성분이라고 한다. 본품은 가격이 사악한데, 다이소에서는 체험해 볼 수 있도록 6회분에 3,000원에 판다. 한 달이면 12,000원인데 굳이 본품을 두 배 이상 가격 주고 살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문제는 모든 국민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전국 품절이란다. 심지어 다이소에 예약을 해두고 점원이 몰래 빼주기도 한다. 인터넷에는 구매하는 방법이 실시간으로 포스팅되고 있는 게 아닌가. 대단한 열풍이다. 다이소에 들어가 바로 점원에게 물어보았다.



"저, 혹시 니들샷 있나요?"


"마침 딱 하나 남았어요. 여기요."

(점원은 정말 계산대 아래에서 조용히 하나만을 꺼내서 내 손에 안 보이게 쥐어주었다.)


"우와 대박, 이걸 이렇게 사다니, 진짜 행운인가 봐요."


"이제 예약도 안되고, 문자 발송해 드리는 것도 안 돼요."


"다이소가 문자도 발송해 줘요? 이런 게 있는지 몰랐어요, "


"아, 문자 받고 오신 게 아니에요? 1인당 2개로 제한됩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3천 원 여기요. 계산해 주세요."




그렇게 나는 인기 절정인 다이소 VT니들샷 100을 구할 수 있었다. 이야 어쩐지 오늘은 뭔가 기분이 좋더니만. 조그마한 가방에 소중하게 화장품을 넣고 다이소를 한 바퀴 구경했다. 이미 마음이 풍족해서 그런지 다른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집에 뭐가 떨어졌는지 고민하다가 유유히 다이소를 빠져나왔다. 


다음 행선지는 올리브영에 갔다. 올리브영은 지금 대대적인 세일에 들어갔다. 12월 연말세일이 가장 할인 폭이 넓다고 하는데,  지금 필요한 것도 없으면서 괜히 얼씬거려 보았다. 지금 세일할 때 사둬야 할 것 같고, 남들 다 사는데 나도 사야 할 것 같고, 안 사면 손해 볼 것 같고. 그런 이상한 심리 있지 않은가. 다들 같은 마음인지 매장 안에는 사람이 바글바글 거렸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렇게 좋다고 하는 앰플들을 얼굴에 한번 발라보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찬바람 쐬니까 다 똑같더라. 






다음 행선지는 바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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