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진 Jul 02. 2022

당신의 잘못이 아닐 수도 있는 일들에 대해

가스라이팅의 시대

 최근 몇 년 사이 대중화되어 자주 쓰이는 심리학 용어 중 하나가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다.  네이버에 검색을 해보니 가스라이팅에 대한 정의가 이렇게나 살벌하게 나온다.

가해자가 타인의 심리와 상황을 조작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어 무력화시킨 후 지배력을 행사하고 피해자를 파멸에 이르게 만드는 병리적 심리 현상

 파.멸.이라니, 섬뜩하다.  

 하지만 난 늘 가스라이팅과는 가장 먼 곳에 있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결코 가스라이팅의 가해자도 피해자도 될 일이 없을 거라 자신하며 말이다.  



 

 군대에 있을 때나, 직장생활을 막 시작했던 이십 대 때에는 나도 순순히 내 탓이라는 말을 잘도 했었다. 내 주장을 펼칠 일이 없으니 시키면 토 달지 않고 '알겠습니다'를 큰 소리로 외쳤고 또 혼내면 시무룩하고 당황한 표정으로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를 반복하면 그걸로 됐다.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으니 뇌를 혹사시킬 일도 없이 그냥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딱 이십 대 때까지였던 것 같다. 서른이 넘어가고 하는 일도 학원 강사로 바뀌면서 '나'라는 캐릭터를 유지하고 키워나가는 일의 중요성을 어느 순간 체득하게 됐다. 그리고 수업 방식이나 아이들을 향한 태도에 원칙은 있었지만 정답이 정해진 건 아니어서 오랜 시간에 걸쳐 나다운 수업과 학생관리 방법을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차근차근 만들어 나갔다.


 여기까진 참 좋았다. 그런데 그사이 부작용도 생겨났다. 그건 나도 인식하지 못한 사이, 내가 어느새 싸움닭이 돼 있었단 거다. 학부모들이나 학생들의 컴플레인을 듣고 에둘러 지적하는 상담실장이나 원장의 훈계에 고분고분 내 죄를 내가 알겠습니다,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한두 마디라도 부당함을 토로했고 심할 경우엔 시시비비를 따져 학부모와 학생의 사과를 기어코 받아내기까지 했다. 타고난 성격이 지X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영역에서 내밀하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외부의 관심과 참견을 극도로 못 견뎌하는 그런 성격?  

 어쨌든 근무했던 학원에서 대체로 관리자들과 원만하게 지내지 못했다. 뭐 그렇다고 명백한 내 잘못을 인정 못할 정도의 먹통은 아니었고, 다만 사달이 나는 경우는 대부분 학원이 정의하는 '효율적'인 시스템에서였다.


 사람이 구축하는 시스템이란 게 다 그렇듯 완벽할 리가 없고 어쩔 수 없이 비효율성과 부당함이 불쑥 못처럼 튀어나오게 돼 있지 않은가. 그저 남은 일은 묵인하고 모두 따를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고 총대를 멜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딱히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지만 둘러말하고 삭혀두는 것에 영 재주가 없다 보니 내 역할은 늘 방울과 총에 먼저 손이 가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면 원치 않게 난 누군가의 공격 혹은 반격의 대상이자 다루기 거북한 강사가 되어 있었다. 덤으로 고집불통, 사회성이 심히 결여된 인간이란 낙인도 은밀하게 나만 안 보이는 내 이마나 등짝 어디쯤에 새겨져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좀처럼 나란 인간은 내 탓입니다, 내가 틀렸습니다, 하고 고분고분 물러서는 겸양의 미덕을 내 안에서 길러내지 못했다.



 

 이런 할 말 다하는 쎈 캐릭터였던 내가 가스라이팅의 희생양이었단 사실을 어느 날 뜬금없이 날아온 카톡 메시지 하나를 통해서 알게 됐다. 메시지는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학원에서 잠깐, 한 반년 정도 바로 옆 교실에서 같이 일한 선생님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마치 고백성사와 같은 긴 내용이었고 대략 요약하자면 이렇다.


"선생님이 퇴사하실 때쯤 팀장님이랑 부원장님한테 지시를 들었어요. 선생님이 학원에서 오래 근무하다 나가시는 거라 아이들이 흔들릴 수도 있고, 아이들을 흔들어 놓을 수도 있으니 선생님과 아이들을 잘 지켜보고 상황을 공유해 달라고요. 이런 지시는 저한테만 한 게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선생님이 말도 안 되는 힘들고 억울한 상황에 처해 여러 번 팀장님, 부원장님과 다투시는 걸 봤는데도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너무 죄송합니다. 이제 와서 사과의 말씀을 드리는 건 저도 선생님과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어서입니다. 분명 저의 잘못이 아닌데도 누구 하나 제 잘못이 아니라고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네요. 다들 제가 부족하고 틀렸다고만 해서 너무 힘듭니다. 선생님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견디셨나요? 도저히 혼란스러워서 그만 두지도, 집중해서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정말 다 저의 잘못인 건가요?"


 뒤통수를 세게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7년간 근무했던 학원을 그만두고 나오던 마지막 몇 개월, 유난히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카톡 메시지에서 언급된 팀장 그리고 부원장과 갈등이 극심했다. 전에 없던 상담 등 학생관리에 대한 간섭, 유독 내가 가르치던 아이들의 부족한 시험성적에 대한 공개적 지적, 아이들에게 수업 중 장난스레 던진 말로 인한 구설 등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럼에도 난 늘 그렇듯 밀리지 않고 열심히 싸웠고, 그것도 아주 잘 싸웠으며 당당한 걸음으로 학원을 나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다만 퇴사 후 몇 개월간 후유증은 심했다. 이건 그들이 아니라 결국 내 문제가 아닐까, 이런 내가 다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와 같은 나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끊임없이 안에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자기 의심은 자기 환멸로 이어지는 무한루프의 우울 상태로 날 내동댕이치곤 했다. 잘 싸우고 당당히 걸어 나왔는데 그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동굴 속으로 기어 들어온 뒤 난 혼자 끙끙 그렇게 한동안 앓았던 것이다.    


 이제 시간도 좀 흘렀고, 일도 다시 시작하면서 지난 학원에 대한 상처가 조금씩 무뎌지는 중이었는데 앞서 말한 카톡 메시지를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섬처럼 꿋꿋이 홀로 싸우고 버텼던 나 자신에 대한 연민이 뒤늦게 천천히 찾아들었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모두 너의 잘못일 수는 없어." 난 속으로 이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리고 모든 게 내 잘못일 순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안도한 채 당당히 다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난 카톡 메시지를 보낸 선생님에게 답장을 보냈다.

"몰랐던 사실들 알려주시고 사과까지 해주신 용기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선생님 자신을 위해서도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잘못한 게 없으시다면 당당하게 맞서세요. 선생님의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단 생각을 먼저 하세요. 마음이 잘 알 겁니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가스라이팅의 정의를 천천히 읽어 봤다. 그리고 가해자란 단어가 유독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 누구와든 싸울 태세로 살아가고 있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난 믿어 왔다. 각자의 선한 의도에는 분명 사.람이 들어 있는 것이라고도 믿었다. 하지만 이번에 내가 겪은 가스라이팅을 통해서 이 믿음이 어쩌면 틀렸을 수도 있단 생각을 했다. 가해자에게 선한 의도는 없다. 사람의 자리를 대신해 차지한 조직이나 신념 혹은 갖가지 욕망을 위해 무고한 희생양을 만들어 내는 자들이 바로 가해자이고 그들에겐 악의만이 존재할 뿐이다.


 살다 보면 어디까지가 내 비난의 몫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단 걸 다들 잘 안다. 그리고 인간관계의 모든 갈등이 가스라이팅과 관련된 것도 당연히 아니다. 그럼에도 어떤 태도로 갈등과 문제에 접근해야 할지 내게 누군가 묻는다면, '내 탓입니다'보다 '내 잘못이 아닐지도 모른다'에서 출발하라고 답하고 싶다. 정답은 물론 없지만, 적어도 우리는 지금 가스라이팅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자신에 대한 믿음과 용기가 조금 더 필요한 시대를. 그래서 이제부터 가끔씩, 때때로 이 말을 되뇌어 볼까 한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모두 너의 잘못일 수는 없어."



 

매거진의 이전글 다들 건강하시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