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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큐 Apr 29. 2024

모방에서 피어난 천재성,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는 파블로 피카소와 다른 듯 닮았다. 우선 다른 점이다. 피카소가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드러내며 그림에 몰두한 데에 비해 고흐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늦은 나이에 그림에 입문했다. 게다가 일찍 죽었다. 고흐가 생을 마감한 나이는 고작 서른일곱이다. 때문에 고흐가 그림을 그린 기간은 십 년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피카소는 말을 하기도 전부터 그림에 열정을 보였다고 하며 아흔이 넘도록 그림을 그리다 죽었다. 또한 피카소는 채 스무 살이 되기 전 인정을 받아 평생 부와 명성을 누리며 살았다. 하지만 고흐의 팬은 동생 테오가 전부였다. 그는 일생동안 가난- 그의 계획성 없는 소비도 한몫했다 -과 외로움에 시달리며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고흐의 죽음에 대해서는 의문스러운 면들이 꽤 있으나 공식적으로는 자살이다 -.



          하지만 예술가로서의 두 천재를 깊숙이 들여다보면 의외로 닮은 점이 많다. 우선 작업량이다. 둘은 많이 그렸다. 3만 점이 넘는 작품을 남긴 피카소야 말할 나위 없지만 고흐도 화가로써 살아간 기간을 감안한다면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많은 작품을 남겼다. 십 년 남짓한 기간 동안 천 여점이 넘는 그림을 완성했으니 말이다. 작업 스타일도 비슷했다. 둘 다 빠르게 그렸으며 같은 주제를 반복해서 그렸다. 그래서 연작이 많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두 천재는 모두 모방의 귀재였다.



          피카소가 앵그르의 《터키탕》을 따라 하기 이십여 년 전 고흐는 자신의 재능을 확신하지 못한 채 이것저것을 열심히 베끼고 있었다. 어찌 보면 고흐에게 모방은 숙명과도 같았다. 늦은 나이에 붓을 잡은 데다가 대화를 대개 격렬한 논쟁으로 이끌어가는 모난 성격 탓에 고흐는 누구 밑에서 배우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림을 가르치는 아카데미에 두 번이나 입학했지만 모두 얼마 버티지 못했으며 호의를 가지고 가르침을 주고자 했던 마우버 같은 훌륭한 스승과도 결국 잘 지내지 못했다. 그래서 고흐는 스스로 배우는 길을 선택했다.



          과학의 발전도 궤를 같이했다. 19세기 일어난 산업혁명과 함께 미술작품은 대량으로 복제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거장의 작품을 보기 위해 더 이상 먼 길을 떠날 필요가 없었다. 대신 책이나 잡지에서 복제품을 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고흐가 과거의 작품들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고흐가 일하기도 했던 구필은 미술품 복제 분야에서 손꼽히는 회사였다. 이 회사의 주인 중 하나는 고흐의 삼촌 센트였고 동생 테오가 근무하는 회사이기도 했다. 때문에 고흐는 테오를 통해 거장들의 작품을 수록한 정기간행물과 《데생 교실》, 《목탄화 연습》을 비롯한 교재들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밀레는 아마도 고흐의 화가 인생 전반에 걸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일 것이다. 고흐는 밀레 특유의 목가적인 분위기를 좋아했다. 이는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 한때 설교자- 목사 -를 꿈꾸었던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고흐는 밀레의 작품들을 따라 그렸다. 특히 《씨 뿌리는 사람》 속 인물을 반복해서 그렸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그림 속 인물을 통해 앞선 두 번의 실패 - 구필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를 만회하고 싶었던 것 같다. 밀레의 작품들을 모사하면서 고흐는 점차 가난한 노동자들의 삶을 그리는 것이 자신의 숙명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고흐는 - 테오가 준 돈으로 - 노동자들을 모델로 고용하여 그들을 그리고 또 그렸다. 고흐가 매월 모델료로 지출한 돈은 무려 60 프랑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 평범한 노동자들의 임금의 세 배 가량 되는 돈이었다. 이러니 재정 문제로 테오와 다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헌신적인 후원자이자 동생인 테오의 희생 덕에 고흐의 초기 대작을 만날 수 있다. 《감자 먹는 사람들》은 그렇게 탄생하였다.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임파스토 기법은 몽티셀리에게서 가져왔다. 몽티셀리는 고흐와 닮은 점이 많은 화가였다. 평생 가난하게 살았으며 격렬하게 작업했다. 비극적인 죽음도 비슷했다. 고흐는 훗날 비극이 시작될 '노란집'에서 고갱을 기다리며 해바라기를 그린다. 그리고 그가 그린 해바라기 그림은 노란색, 주황색, 유황색 일색인 몽티셀리의 그림과 무척 닮아 있다. 상징과도 같은 강렬한 보색은 들라크루아의 것을 가져왔다. 그는 빈센트의 신이었으며 - 코르몽 화실의 한 동료의 증언에 따르면 - 그를 이야기할 때 고흐의 입술은 감동으로 떨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고흐는 색상을 깊이 연구했다. 방법은 특이했다. 털실 뭉치들을 짝 맞추었다가 떼어 놓았다 하면서 색채를 대비시켰다. 이 역시 색채의 대가 슈브륄의 방식을 차용한 것이었다.



          고흐에게 영향을 미친 것들을 이야기하면서 일본화를 빼놓을 수는 없다. 피카소에게 아프리카가 있었다면 고흐에게는 일본이 있었다. 빈센트는 동생 테오가 있는 파리로 이사하면서 당시 유행이었던 일본 미술- 자포니즘 -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레 일본의 그림, 아니 더 나아가 일본이라는 나라에 흠뻑 빠지게 된다. 이후 고흐는 일본 판화 천여 점을 수집한다 - 이 역시 동생 테오의 돈이었다 -. 그리고 열심히 베낀다. 일본화 모사를 통해 고흐의 그림은 많은 부분에서 변하게 된다. 어두운 색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밝은 색들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윤곽선도 그려 넣게 된다. 명암이 아닌 순수한 색채의 면들을 과감하게 구사하기도 한다.



          고흐의 모방은 특별했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유별났다. 고흐는 대개 그림을 따라 하는 것을 넘어 모방의 대상과 자신을 동일 시 하곤 했다. 이를 위해서는 따라 하려는 대상과 자신의 공통점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고흐는 모방하려고 하는 대상에 집착했다. 자신의 영웅과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고흐는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명분을 찾음으로써 눈앞의 비참한 현실을 합리화할 수 있었다.



          밀레에 빠져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흐는 밀레의 작품을 따라 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삶을 베끼고자 하였다. 심지어 밀레를 따라 피아노를 배우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다른 이들을 따라 할 때도 그랬다. "남부, 아프리카로 가야 한다"는 들라크루아의 메시지에 따라 - 일본에 대한 동경도 영향을 미쳤다 - 남부 프랑스로 떠났으며, 광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모습을 보일 때면 졸라의 《걸작》 속 주인공인 클로드 랑티에와 자신을 비교하며 상황을 합리화했다. 심지어 자신의 비참한 죽음을 예상이라도 하는 광기와 음주로 인사불성이 되어 카페 탁자에서 널브러진 사망한 몽티셀리를 겟세마니 동산에서 순교한 예수와 비교하기까지 하였다.



          화가만이 고흐의 영웅은 아니었다. 고흐는 화가를 비롯하여 소설가, 시인, 음악가, 심지어 철학자들까지 자신의 멘토로 만들었다. 많기도 했다. 화가만 해도 밀레, 루벤스, 들라크루아, 렘브란트, 고갱, 몽티셀리, 퓌비 등 셀 수 없이 많다. 이에 더해 졸라, 디킨스, 안드레센, 알퐁스 도테 같은 소설가들과 휘트먼 같은 시인도 고흐의 모방 리스트 상단에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헤겔이나 칼라일, 니체 같은 철학자가 한 말도 고흐의 편지에서 심심치 않게 보인다.



          고흐가 이토록 다양한 분야의 거장들을 모방할 수 있었던 요인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고흐가 다독가였다는 점이다. 그는 문학과 인문학을 넘나들며 많은 책들을 읽었다. 독서를 통해 얻은 박학다식함은 때론 지나친 논쟁으로 주변 사람들을 떠나게 하는 요인이 되었지만 모방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는 분명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두 번째 요인으로는 생각이 유연했다는 점이다. 나쁘게 말하면 변덕스럽다고 느낄 정도로 그동안 해왔던 것에 정반대 되는 개념들도 받아들였다. 고흐는 '노란집'에서 고갱을 만나기 전까지 고흐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헤겔이 그의 저서 《미학》에서 주장한 대로 사물의 특성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추함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상을 정직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흐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만 그렸다 - 그래서 모델에 집착했을 것이다 -. 촛불에 의지해 야경을 그릴 정도였다. 빨리 그리기도 했다. 자신이 대상에 대해 느끼는 인상이 사라지기 전에 그려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갱을 만나고는 생각이 변했다. 그는 기억에 의지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별이 빛나는 밤》이다. 고흐는 생레미에 있는 요양원-정신병원-에서 이 그림을 그렸는데, 그곳은 통제된 환경으로 밤에 밖에 나가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그래서 고흐는 고갱에게서 배운 대로 기억에 의지해서 이 그림을 그린다. 덕분에 우리는 이 대작을 볼 수 있다.



          《별이 빛나는 밤》에서는 그토록 유별났던 고흐의 모방이 귀결된다. 우리는 흔히 물감을 먹어가며 광적인 붓질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지만 실제 고흐는 철저한 계획과 치밀한 계산 하에 이 대작을 그렸다고 한다. 적어도 고흐의 전기를 쓴 라이너 메츠거에 따르면 말이다- 물감을 먹으려고 시도하다가 그림 그리는 것이 금지된 적은 몇 번 있었다 -. 그림 속에는 고흐가 따라 하려고 했던 수많은 거장들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들라크루아의 강렬한 보색, 몽티셀리의 거친 붓질, 일본화에서 본 듯한 굵은 테두리, 심지어 평소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쇠라의 점묘법까지, 이 모든 거장들의 손길이 서로 섞이며 고흐의 천재성은 피어난 것이다. 그림 속 하늘의 달과 별들은 순교의 상징이다. 물론 순교자는 예수이다. 그 옆에는 몽티셀리와 고흐 자신의 별이 빛나고 있다.     



          오바마가 열광했다는 소설 《삼체》에서 주인공 남녀는 우주가 폭발하며 태양계가 3차원에서 2차원에서 변화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동시에 익숙한 그림 하나를 떠올린다. 그 그림이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다. 그렇다. 고흐는 시골의 한 정신병원에서 3차원의 광활한 우주를 2차원의 종이에 새겨 넣은 것이다. 어찌 보면 이것이 창의력이 아닐까 한다. 그가 따라 하려고 했던 수많은 것들이 서로 연결되며 대작이 탄생했으니 말이다.



          나는 - 이미 연재한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연결', 피카소의 '다작(질보다 양)'과 더불어 고흐의 '모방'이 창의력의 열쇠라고 믿고 있다. 적어도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우리 대부분은 아인슈타인의 두뇌가 없다. 하지만 다빈치처럼 다방면의 지식을 쌓아 서로 다른 것들이 연결되기를 기다릴 수는 있다. 또한 피카소처럼 많이 해볼 수도, 고흐처럼 이것저것을 따라 해 볼 수도 있다. 창의적인 사고의 마스터 키는 없다. 왜냐하면 창의력은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을 넘나들며 찾아오게 마련인데 우리는 무의식의 영역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의식의 영역에서의 노력이다 - 물론 양질의 휴식을 취함으로써 무의식의 영역에서 지식이 연결될 확률을 높일 수는 있다 -. 나머지는 운에 맡길 수밖에 없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겸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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