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소명을 다 한 마음
며칠 전 주문한 그릇이 드디어 왔다. 새 그릇을 닦으려는 찰나에 도자기로 된 주방세제 용기가 금이 가더니 깨졌다. 똑, 하고. 기다리던 선물이 오면 곧 원치 않는 소식이 뒤따라 오는 것 같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은 같이 온다고 한다는 옛 말이 그래서 있나 보다.
새로 산 그릇은 내 취향에 딱 맞아서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다. 반면 새 주방세제 용기를 찾아보는데, 영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주방세제 용기가 뭐라고 그냥 아무거나 사면 되지. 나는 꼭 이런 자잘한 부분에서 마음에 꼭 맞는 것을 찾으려고 애쓴다. 그래서 며칠이고 인터넷 세상을 헤매다가 마음에 드는 것을 찾으면 기쁜 마음으로 택배 상자를 기다리고, 마음에 드는 게 없으면 구입을 미루곤 지내곤 한다. 낯선 여행지에서 지도 없이 한참을 길을 헤매다가 고개를 딱 들었을 때 원하는 목적지를 발견하는 순간. (그 기분을 일상에서도 느끼고 싶은 마음인 건가?) 그 기쁨을 기다리며, 좋지 않은 일 뒤에는 그로 인한 즐거운 순간도 오리라 믿는다. 인생사 새옹지마.
문득 도자기가 깨진 것을 보고 있자니, 몇 년 전 이모부께서 해주신 말씀이 생각났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며 몸도 마음도 피로에 찌든 어느 날이었다. 저녁식사를 함께 하던 이모부께서는 무심하게 툭 말씀하셨다. 너무 애쓰지 말고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둬도 괜찮다는 말을 덧붙이셨던 것 같다.
모든 그릇은 깨지게 되어 있다.
그 무렵 나는 번아웃에 빠져있었다. 부지런한 한국인 성정에 대충 살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만은, 전형적인 한국인인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항상 열심히 살아왔다. 딱히 목적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주어진 일이 있으면 빨리 처리해야 속이 편했고, 할 일이 없으면 뭔가 불안한 마음에 일을 찾아서 하는 성격 탓이었다. 학창 시절에는 (딱히 공부는 아니었지만) 무언가를 열심히 해서 그로 인해 얻는 성취가 좋았다. 그러다 보니 친척들이 모인 가족 모임에서는 꼭 나처럼만 하라는 말이 사촌동생들에게 흔히 가해지는 압박이었다. 그 모습들을 봐온 이모부는 번아웃 상태에 빠진 나를 정확히 알아보셨다. 그래서 흘러가는 대로 두어도 괜찮다며, 둔감력을 키우라고 자주 말씀해주셨다. 어떤 날은 저녁 식사자리에서, 어떤 날은 문자 메시지로.
오랜 시간 제 역할을 해온 그릇은 어느 순간 금이 가고 깨어진다. 사람의 마음도 그런 것 같다. 외부의 압력이 작용해 깨어지는 일도 물론 있지만, 충분히 애쓴 마음이 스스로 깨어지는 일도 더러 있다. 번아웃이 온 나는 내 마음이 깨진 이유를 찾기 위해서도 열심이었다. (제발 자잘한 건 대충 넘겨라..!) 왜 내가 힘든 건지, 누구나 이런 건지, 어떤 압박 때문이고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물론 딱 맞는 이유를 찾지 못했고 그래서 효과 직빵인 약을 찾지도 못 했다. 지친 채로 흘러가다 보니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그런데 외부의 압력이 없이도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세제통을 보며 깨달았다.
가만히 되뇌어본다. 멀쩡히 있던 세제통이, 마음이 갑작스레 깨어진 이유를 찾기 위해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된다. 제 자리에서 묵묵히 제 쓰임을 해오는 시간들이 누적되면서 자연스레 소진될 수도 있으니. 그저 마음에 꼭 드는 새로운 용기를 찾으면 된다. 그릇도, 마음도. 지나가다가 어느 순간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쥐면 된다. 마음에 꼭 드는, 도자기로 만들어진 새 세제통을 찾기 위해 인터넷 쇼핑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