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가까운 사람들 중에서 친인척의 결혼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초대받은 결혼식이었다. 20대가 되며 낯선 곳에서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다니고, 수많은 사람들과 스쳐 지나가며 내 곁에 남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중 한 명이 이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의 제2막을 여는 문턱에서 내게 그 시작을 알린 것이다.
연락이 일방적으로 끊긴 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내가 인연을 끊어낸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어떨 때는 나의 오만과 무관용, 위선, 이중잣대, 그리고 내 멋대로 만든 그 사람에 대한 환상 때문이었고, 어떤 경우는 소위 말하는 '손절당한' 측에서 잘못한 경우도 있었다. 문득, '언제 할지는 모르겠지만, 내 결혼식에서도 이 친구를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식을 흔히들 '인간관계 대청소의 기회'라고들 한다. 나는 이번에 A에게서 '걸러지지' 않았다. 과연 언젠가 내가 결혼식을 한다면, A의 축하를 받을 수 있을까? 내가 A를 초대하게 될까? 아직은 모른다. 사람일은 한 치 앞을 못 보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시시덕대던 상대와 말 한마디에 철전지 원수가 될 수도 있는 게 우리네 인간이라는 감정적인 동물의 현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A와 나의 인연이 앞으로도 계속되었으면 하고, A의 앞날에 행운이 가득하였으면 좋겠다. 그동안 고생한 만큼, 하나씩 하나씩 원하는 바를 이루어갔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그 친구는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다가 넷플릭스 인기 시리즈 <키싱 부스(Kissing Booth)>를 보게 되었다. 이 시리즈는 작년 말에 1편과 2편을 몰아서 봤는데, 원래 나는 로맨스 영화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코시국 이후로는 생전 생각지도 않던 로맨스 드라마/영화/소설을 게걸스럽게 찾아보고 있다. 중간중간에 오해와 갈등이 있지만, 종국에는 주인공이 행복해진다는 점이 로맨스 장르의 매력인 것 같다(새드엔딩도 있지만, 대부분의 로맨틱 '코미디'는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며칠 전 넷플릭스에 새로 공개된 <키싱 부스 3>을 볼 때는 처음에 영화를 누르며 기대했던 대로 가벼운 마음이 드는 게 아니라, 여주인공의 모습에서 과거의 내가 겹쳐 보여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신입생이 되는 여주인공 Elle은 욕심이 많은 아이이다. 사랑도, 우정도, 행복한 가정도 모두 갖고 싶어 하는 욕심쟁이 말이다. 그래야만 행복한 인생이고, 후회가 남지 않는 인생이라고 믿는 듯하다. 그 누구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몸을 쪼개가며 이것저것 다 가지려다 결국에는 하나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하기도 한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과거의 미숙했던 내가 하나둘씩 겹쳐 보인다.
나 역시 막 세상에 나왔던 스무 살의 여명에선 무엇이든 다 해내는 팔방미인이 멋있는 사람이고, 인맥은 다다익선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생 때까진 앉아서 공부만 하면 되었는데, 갑자기 세상은 나에게 '외향성'과 '인맥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고, 그런 갑작스러운 변화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나는 그 기준에 나를 맞추려 부단히 노력했다. 나는 모범생이었으니까. 세상의 가이드라인과, '정답'을 따르는 모범생. 그 시도들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지만 말이다. 어렸을 때의 나는 유토피아와 성선설을 꿈꿨고 그래서 이용당했다. 이를 테면, 나라는 사람의 '인맥의 역사'란 세상이 원하는 '인싸'가 되고자 고군분투했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본성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이야기이다.
휴대폰과 카카오톡에 저장된 알 수 없는 이름들은 점점 늘어만 갔지만 실제로 그 연락처를 쓸만한 일은 별로 없었다. 대부분이 무의미했다. 그래서 가지치기를 했다. 사실, 최근에도 '삭제 작업'을 했다. 몇 달간 심각한 고민을 했고, 내가 너무 타인에게 박한 건가 싶어서 마음이 불편했다. 나조차도 전혀 완벽한 사람이 아니니까. '마지막으로 우리 관계에 기회를 줘보자.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란 생각으로 B를 만나러 갔을 때, 나는 몇 년 간 느꼈던 께름찍함을 또 느껴버리고 말았다. 분명 B와 함께한 즐거운 기억도 많은데, 왜 나는 그 친구만 만나고 오면 종종 미묘한 기분이 들었을까. 아마도 항상 나를 평가하는 듯한 그 말투와 눈빛에 숨이 막혔던 것 같다. 잘해줄 때는 정말 둘도 없는 친구인데, B 특유의 '도덕적 우월감'이 나를 계속 부족한 사람으로 느껴지게 했다. 이런 애매모호한 점이 나를 미치게 했다. 언제부터인가 B를 만나러 가면 나의 모든 행동을 해명해야 할 것 같았고,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하며 정신적 피로도 많이 느꼈다.
그래서 나는 비겁하지만 그저 조용히 B를 끊어냈다.
이 주제는 참으로 뜨거운 감자인 듯하다. 절교를 마음먹었을 때, 속에 쌓여있던 걸 풀지 아니면 소리 소문 없이 그 사람을 내 인생에서 밀어낼지. 핑계로 들릴 수도 있지만, 내가 '회피 법'을 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어차피 그 사람이 무엇을 하던 나의 마음을 변하지 않을 텐데, 굳이 마지막까지 서로 싸움을 하고 상처를 주고받아야 하는 것의 실익이 없다. 2) 나는 남을 변화시킬 수도, 행동이나 말투나 사상을 바꾸라고 설득할 수도 없다.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내게는 그럴 의무가 없다. 그럴 수 있다면, 애초에 우리가 이렇게까지 어긋났을까.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혹자는 '사람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인연에는 끝이 있다'라고 하고, 다른 누군가는 '사람이 변하기 때문에 인연이 끝나는 것이다'라고 한다. 둘 다 절반씩만 맞는 말일 것이다. 친구든 연인이든, 처음에는 콩깍지에 씌어 그 사람의 장점만 보인다. 그리고 아직 함께한 시간이 적기 때문에, 관계의 초창기에 사람들이 자신의 첫인상을 위해 투자하는 겉모습에 속기 마련이다. 그러다 하나둘씩 단점이 보이게 되는 시점이 올 때 그 모습을 '본성'으로 보느냐, 아니면 '배신'으로 보느냐에 따라 의견이 갈리는 것일 것이다. 나는 대체로 사람의 '큰 틀'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 본다. 모든 사람은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도, 자신을 이해받지도 못하는 '섬'이라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 골라 쓰는 것이라는 말도 믿는다.
A의 청첩장을 받고는 괜스레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앨범까지 다 뒤져본 나는 심경이 복잡해졌다. 이 친구들은 다 무엇을 하고 사는지, 행복한지, 괜한 궁금증이 들었다. 그중 불의의 사고로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은 친구들도 있어 사진으로나마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에 울컥하기도 했다. 학교를 다니는 중에는 몇 번 말을 나눠본 게 전부였지만, 갑작스러운 사고로 같은 학교 학생 두 명이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졸업식을 앞두고 들뜬 내 마음이 얼마나 놀랐었고 동시에 밑바닥으로 가라앉았었는지도 기억한다. 그 친구들이 살아있었다면, '언젠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는 나와도 친해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쳐서, '어? 혹시 00 고등학교 나오지 않으셨어요?'라고 말문을 트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한때 싸이월드에서 내 유일한 일촌이었던 친구는 요즘 어디서 무얼 하고 사는지 모른다. 또 다른 한때 내 페이스북 피드를 점령했던 친구들 역시 <키싱 부스>의 등장인물들처럼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마지막에 '정말 끈끈했던' 인연들은 결국 어떻게든 다시 만나게 된다. 내가 '역시 영화는 영화구나'라고 느꼈던 것이 아마 이 지점일 것이다. 아직까지 내가 경험한 바로는, 인연은 '타이밍'이기 때문이다. 시기를 놓친 사랑고백과 진심 어린 사과는 그 용기가 갸륵하지만 쓸모가 없다.
또, 개인적으로는 '인연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걸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어른이 되려면 겪어야 하는 성장통 같기도 하다. 나라는 사람 역시 '큰 틀'은 비슷하나, 10년 전이나 5년 전과 완전히 똑같냐 하면 그건 아닐 것이다. 그 사이에 나의 관심사가 조금 바뀌기도 했고, 경험으로 인해 180도 전복한 의견이 있는가 하면 단단하게 굳어버린 편견도 있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사람의 '큰 틀'과 달리 '작은 틀'은 조금씩 유연하다고 믿는 이유이다. 무엇이 상수이고 무엇이 변수인지, 그리고 내가 가중치를 크게 두는 영역이 어디에 속하는지에 따라 인연의 유통기한이 결정될 것이다.
나이 들수록 삶에 치이며 기존 인연을 정리할 일이 많이 생기기도 하고, 현재 가장 가까운 사람 중 몇 명은 전혀 예상치 못하게 만나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었기에 '인연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시행착오의 기간이었던 스무 살과 스물한두 살 정도를 제외하고는, 나는 줄곧 사람을 좁고 깊게 사귀는 걸 선호했기 때문에 한 명, 한 명의 인연에 대해서 참 오래도 곱씹게 되었다. 내게는 악마 같았던 누군가도 자신과 잘 맞는 사람에게는 어쩌면 천생연분일 것이고, 또 어쩌면 영원히 지키고 싶은 우정의 주인공일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면 약이 오르지만 어쩌겠는가. 나 역시 그런 이중적인 사람이었을 것을. 그래서 인연(人緣)이 아니라 인연(因緣)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