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온수 Aug 26. 2021

상담사, 상담을 받으러 가다 #2

"그 때의 어린 저한테 해주고 싶은 말은... 아무것도 없어요"

분명 이번 상담은 저번 상담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상황이 달라서일까?

나를 위해 울어주셨던 정말 따듯했던 저번 상담 선생님과 상담을 할 때에는 일주일 동안 상담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다. '어서 가서 이런 얘기 해야지, 위로받고 싶다' 하는 생각과 함께.

이번 상담은 느낌이 다르다.

가기전에 많이 긴장이 된다. 아직 선생님이 낯설어서 그런걸까? 이런저런 생각과 떨리는 가슴을 안고 도착한 센터.


... 주차 자리가 없었다.


아씨 어쩐지 오늘 떨리더라니.

겨우겨우 근처 주차장에 힘겨운 주차를 하고 나는 상담센터로 향했다.


"저번에 상담하고 어떠셨어요?" 라는 말로 상담을 시작하신 선생님에게 나는 의뭉스러운 얼굴로 “생각은 많았는데 잘 정리가 안됐어요”라며 정보가라고는 마른 뼉다구만큼도 없는 대답을 했다.


"저번 시간에 유학 시절의 어려움에 대해 말했던 것 같은데 혹시 그 이야기부터 시작해도 될까요?"

나는 그 질문에 말문이 턱 막혔다.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는 나의 유학 초기 시절.

상담을 받을 때마다 했던 이야기이기도 하고, 나를 깊이 이해하고자 했던 가까운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반복해서 했던 이야기라 '그 얘기는 1분, 5분, 10분 코스가 있습니다, 어느 걸로 하시겠습니까?' 라고 말 할 수 있을만큼 정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뭔가 심통이 났다.


"... 선생님.  얘기...  수는 있는데 하려니까 너무 지쳐요."


음? 생각보다 너무 직구로 말이 나가버렸는데...?

원래 상담의 기본  하나가 과거의 중요한 사건들을 탐색하는 건데  도와주시려는 선생님께, 나의 대선배님이기도  선생님께 이런 말을 해도 되는걸까? 싶었지만 나도 모르겠다.  입은 이미 컨트롤을 떠나 이미 과거에 여러번  얘기라 얘기하기 싫다고 나불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하고싶은 이야기도 있었구요..."


내가 이렇게 덧붙이자 선생님은 눈을 반짝 빛내시며 그럼 그 이야기를 하자고 하셨다.

사실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얘기는 요즘 받고있는 집단 상담에 대한 이야기였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꼭 거쳐야하는 과정이기에 꾹 참고는 있었지만 총 4회기 중 벌써 절반을 지나온 집단상담은 정말이지, 갈 때마다 치질환자가 변기에 앉는 것 같은 고통을 내게 선사해주고 있었다.

분명 이거 내게 도움이 되려고 하는 집단인데... 왜 이리 힘든지 고민해봤더니 아무래도 나는 집단에서 영 이질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너무 불편했다. 그리고 공감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상담사로서 실격 아닌가, 그런 생각들이 자꾸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되게 따듯하게 막 서로 공감하고 좋은 말 해주고 마음을 읽어주고 그러는데, 저는 하나도 공감이 안 되는 거에요



"이번에 참여한 집단은 상담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집단이에요. 주제도 딱 정해진 건 없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진짜 여러가지 주제로 말을 하거든요. 연애며 육아며 기타 등등. 근데 사람들끼리 그.. 특히 이게 상담자 집단이라 그런지 엄청 공감적이고 따듯한 말을 서로 해주는 거에요. 근데 그게 너무 가식같고, 저는 하나도 공감도 안 되고 그냥 빨리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더라구요."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다는 건 어떤 뜻이에요?"


"그냥 말 그대로... 공감해주고 감정 읽어주고 그런게 너무 싫더라구요."


"근데 그런 얘기를 집단에서 하진 않았나봐요."


"아휴 어떻게 그런 얘길 하겠어요. 찬물 끼얹는 게 될 텐데요. 저는 그 공간에서 너무 이질적인 존재로 느껴졌어요."


"이질적인 생각들을 말을 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음... 그럼 이해받지 못하겠죠... 이해받지 못하고... 관계를 맺지 못할 거에요."


나는 이 얘기를 하면서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해'라는 키워드는 나를 참 오랫동안 괴롭혀온 역사있는 친구다. 이해는 단숨에 나를 초등학교 저학년 즈음의 나에게 데려갔다. 내가 참으로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나.

일반적인 남들에게 생각없이 행복했던 유년 시절이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참 버거웠고 힘들었다. 인생 그래프를 그릴 때마다 나는 어린 시절을 저 밑바닥에 그리고 오히려 악명높은 고삼 시절을 '학창 시절 중 가장 행복했던 기간'으로 회상한다. 물론 스무살이라는 지하층도 있긴 했지만.


내가 어릴 때 엄마는 몸이 무척 약하셨다. 쓰러진 적이 몇 번 있었고, 나중에 오진으로 밝혀지긴 했지만 죽을 수 있다는 이야길 듣기도 했었고. 휴직을 한 엄마가 누워서만 보낸 시간이 2년 정도였다. 많은 경우 어머니가 몸이든 마음이든 무척 약하다고 인지하고 자란 집의 아이들 - 특히 첫째들은 어머니의 역할을 많이 아웃소싱해오기도 하고 자처해서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며 자라기 마련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쥐똥만한 게 정신적으로는 집안을 책임져야된다고 굳게 믿었었다.


'나이 많은 할머니와 어린 동생은 내가 보호해야돼. 엄마는 약하고 아빠는 관심이 없어.'


그런데 아직 열 살도 안 된 애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동생 가정통신문에 엄마 대신 위조 사인을 해주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게 무척 버거웠다. 기질적으로 민감하게 타고나서 가뜩이나 세상만사에 두려운 것 수두루빽빽인 나에게, 그 책임은 무척 무거웠던 것 같다.



그 때 힘들었던 어린 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없어요.



"어휴 그 어린애가 그렇게... 지금 만일에 그 어린 아이에게 말을 해준다면, 무슨 말을 해주고 싶어요?"


이야기를 쭉 듣던 선생님이 그렇게 물었다. 그리고 나는 머리가 하얘졌다.


"어.. 음... 현실을 똑바로 인식하고... 너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저 현실 인식이라는 건 [지금 너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꼬맹아]라는 뜻이며 걱정하는 일이 [우리집이 굶어죽을 정도로 가난해지는 것]이라는 뜻이라는 부연설명을 덧붙이지 않았음에도, 선생님은 내가 그 힘겨웠을 당시의 어린 아이에게 전혀 위로나 공감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확실히 인지하고 계셨다.


"음...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거다...?" 라고 선생님이 되물어주신 순간, 나는 마음 속에 맴돌던 말들을 그냥 툭 하니 뱉어냈다.


"선생님, 솔직히 아무말도 하고 싶지가 않아요. 그 때의 어린 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 없어요. 그냥 위로도 공감도 그런거 싫어요."


이 말을 하는데 눈물이 뚝뚝 흘렀다.

혹시나 선생님이 내게 위로의 말을 해줄까봐, 따듯하게 해줄까봐 너무 걱정이 되었다. 그 순간에는 그게 정말로 질색팔색 싫었다.

 

"제가 원래 공감을 못하던 사람은 아닌데.. 요즘 그래요. 요즘 너무 그래요.

요즘의 저는 너무 약하기만 해서... 나약한 게 너무너무 싫어요 선생님."


나에게 아픈 엄마는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지만, 또 한 편으로는 절대 [닮고싶지 않은 대상]이기도 했다. 나는 엄마처럼 살고싶지 않았다. 늘 아파서 불편한 것도, 이유도 많았던 엄마. 어릴 때 건강했던 나는 엄마와는 달리 강하고 싶었고, 독립적이고 싶었고, 능력있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모든 일을 못하는 변명으로 [몸이 아프다]를 들고있다.

몸이 아프면 누워서 책이라도 읽을 수 있을 줄 알았지, 연료 좀 못 넣어줬다고 뇌까지 안돌아갈 줄은 몰랐다. 그래도 5년 전엔 하루에 5시간 정도는 집중해서 공부든 일이든 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2-3시간도 버거웠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대학원을 다닐 수 없었다.

그게 너무 절망스러웠다.


몸에 대한 분노가, 받아들일 수 없는 나 자신의 모습이
모든 약한 것에 대한 혐오로 표현되고 있었다


나름대로 나는 학자의 길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내게 익숙했던 길이기도 하고,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길이기도 했다. 나는 집중하고 몰입하고 쌓아가는 데에서 큰 즐거움을 얻던 사람이었다.

그게 즐거웠고 보람찼다. 평생 공부를 하며 산다는 것에 큰 부담감을 못 느꼈던 사람이었다.

나의 존재 가치를 커리어를 쌓아가는 데에서 찾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나는 어떤가? 그 모든 가치를 차압당하고 몸이라는 감옥에 갇혀서 그저 하루하루를, 의미없이 누워서 골골거리며 유튜브나 보면서 웃다가 흘려보내는 것이다.


희망이 없다.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왜냐하면 지난 십 년간 몸은 계속 안 좋아졌으니까.

이런 이야기를 쏟아내면서 나는 그동안 내가 꾹꾹 눌러왔던 하루하루의 절망이, 내가 인지하고 있던 것보다 무척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몸에 대한 분노가, 받아들일 수 없는 나 자신의 모습이, 모든 약한 것에 대한 혐오로 표현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은 약한 나 자신이었고, 아픈 내 몸이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하며 나는 많이 울었다. 이제 겨우 두 번 본 사람 앞에서, 마스크가 푹 젖어버릴 정도로.

누군가 커다란 막대기로 가라앉아 있던 흙탕물을 휘휘 저어 놓아서 모든 느끼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 한꺼번에 소용돌이치며 올라온 듯한 감각이었다.

그 감각에 휘말려 한참 울고나니 민망하기도 하고 생경하기도 하고 아릿하기도 한 가슴의 통증이 상담이 끝나고 나서도 그곳에 한참동안 남아있었다. 그게 힘들어서 집에 와서 한참을 누워있었다.


퇴근하고 돌아온 이불메이트에게 오늘 상담받았던 이야기를 하자 그는 속상해하며 '너가 어린 너를 대하는 게 지금 네 몸을 대하는 것과 똑같아서 마음이 너무 아파'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아, 이 모든 게 좋아지려면 내가 약한 나도 좀 받아들여야 하는건가' 싶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나한테는 내 몸을 받아들인다는 개념 자체가 낯설고 나를 용서하는 방법도 모르겠는걸.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렇게 빵빵 울고오고나니, 내게 말랑한 감정과 공감능력이 조금은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상담사, 상담을 받으러 가다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