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하 Sep 11. 2021

멈추지 못하는 당신에게

영화 <걷기왕>

안녕하세요, 사하입니다. 네 번째 편지예요.

새 학기가 시작되어서인지 어수선한 요즘입니다. 어떻게 살아가고 계세요? 한 해의 끝을 향하는 걸음에 박차를 가하느라 하루가 모자라진 않으신지요. 그렇다면 턱에 힘을 빼고 숨을 좀 쉬세요. 우리는 단거리 육상 선수도 아니고, 따지자면 인생은 장거리에 가까우니까요. 호흡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인생을 달리기에 빗대다니 지루하지만, 지루한 비유를 할 때마다 생각나는 웃긴 영화가 있어요. <걷기왕>이라는 영화인데요. 제가 정말 좋아해요. 그런데 그런 기분 아시나요? 좋아하는데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는 기분이요. 저한테 이 영화가 그래요. 그래서 글감으로 쓰려다가 번번이 실패하곤 했답니다.

또 실패하기 전에 줄거리부터 소개해볼게요. 배경은 시골, 주인공은 17세 여고생 ‘만복’이에요. 땅에서 5cm 정도 붕 떠있는 느낌의 만복이는 이렇다 할 특기도, 취미도 없지만 ‘걷기’ 만큼은 아주 잘한답니다. 멀미가 심해서 무려 왕복 4시간(!) 거리의 학교를 매일매일 걸어 다니거든요. 경기도 통근자도 울고 갈 정성이죠. 그 정성이 ‘열정 집착’ 담임 선생님을 감동시키는 바람에 만복이는 대뜸 체육 특기생이 돼버려요. 걷는 건지 뛰는 건지 모르겠는 ‘경보’라는 낯선 종목을 만난 후로 만복이는 푸른 논밭이 아닌 붉은 레일 위를 걷기 시작합니다.

‘선생님의 추천으로 우연히 시작한 경보... 그렇게 올림픽 우승까지!’ 같은 스토리는 안타깝지만 없어요. 물론 여느 스포츠 영화처럼 만복이는 최선을 다해요. ‘노력에는 끝이 없다’는 선생님의 협박 비슷한 응원에 따라 발톱에 새카만 피멍이 들 때까지 노력하구요, 대회 출전을 위해 서울까지 걸어가는 열정도 보여주죠. 하지만 어렵사리 시작된 경주에서, 만복이는 선두를 다투던 선수들과 넘어지고 말아요. 빨리 일어나라고 호령하는 감독들, 절뚝이며 나아가는 선수들을 멀뚱히 쳐다보면서 만복이는 생각하죠. “근데 나 왜 이렇게 빨리 달렸던 걸까?” 조금 느려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며, 만복이는 발라당 드러눕습니다.

사실은 뻔한 메시지예요. 왜, 서점에 그런 책들 많잖아요. ‘쉬어가도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같은, 한없이 관대한 위로를 건네서 약간의 황송함까지 느껴지는 에세이들이요. 저는 그런 거 싫었거든요. 뭐랄까, 재수 없다고 해야 할까요. 힘들어하는 저를 보고 '거 봐 멈추라고 했지?'하고 약 올리는 느낌이랄까요. 너무 희망차서 도리어 숨이 막히는 기분이요. 속이 비비 꼬여서 인지 몰라도 저는 그랬어요.

<걷기왕>의 결론도 똑같잖아요. 만복이의 입을 빌려 영화가 하는 말은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가라’는 뻔한 위로죠. 그런데 만복이의 경주를 보는 동안 저는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거든요. 왜였을까요? 만복이의 위로가 제 마음까지 다다를 수 있었던 건, 어떤 힘이었을까요?

영화 <걷기왕> 중 만복이(심은경 배우)

대회 전 만복이는 악몽을 꾸는데요, 1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하자마자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려서 다시 뛰기를 반복하는 꿈이에요. 어디로 왜 달리는지도 모르고서 달리다 넘어지면 사람들의 비난이 들리죠. 꿈에서 퍼뜩 깨어난 만복이의 등은 너무 작아요. 어른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열정’ 속에서 질주하는 만복이는 외롭고 지쳐 보이죠. 

그리고 바로 이 장면에서, 저는 위안을 받았습니다. 달리기를 멈춘 만복이 아닌, 두려움을 안고 쫓기듯 달리는 만복이의 모습에서요. 영화가 왠지 이런 말을 들려주는 것 같았거든요. ‘네가 왜 그렇게 달릴 수밖에 없는지 알아. 멈추지 못해도 괜찮아. 그건 네 탓이 아니야. 근데, 멈춰도 별 건 없더라. 굳이 안 달려도 괜찮더라.’ 하고요.

노력해야 한다는 부담감, 나만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감, 실패자로 비난받을 것 같은 두려움이 만복이를 계속 달리게 하죠. 그런 마음을 모두 끌어안고서 만복이는 멈추는 거구요. 그렇기에 ‘조금 멈춰가도 괜찮다’는 영화의 메시지에는 ‘멈추지 못하는 마음’이 담겨 있어요. 그 마음까지도 알고 있기에 위로는 조심스럽죠. 함부로 위로하지 않는 영화의 망설임이, 위로를 위로답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당신이 불안에 시달리며 쉼 없이 내달리고 있다 해도요. 당장 멈추라는 말은 못 하겠어요. 멈추지 못하는 마음도 조금은 이해하니까요. 하지만 만복이처럼 ‘이제 안 해!’하고 냅다 드러누워도 별 일은 없을 거예요. 멈추면 알게 되거든요. 우리는 언제든 다시 원하는 곳으로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요.     


-2021.09.11. 사하 보냄.

작가의 이전글 소비하는 당신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