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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지영 Aug 12. 2023

리코더와 움베르토 에코

축구광의 태도에 대한 예를 들고자 했으나 (나에게는) 실패한 에코

‘움베르토 에코’

중세학자, 철학자, 기호학자, 언어학자, 문학비평가,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의 이름 앞에는 평범한 사람은 하나도 되기 힘든 직업들이 몇 개씩 나열된다. 한국에서는 특히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작가로도 유명하다. 나는 ’ 장미의 이름‘으로 처음 움베르토 에코를 접했다. 영화는 보지 않았지만, 약간의 중세 덕후여서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 ‘중세의 미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책은 3번을 읽었다. 그런데 이 작은 책을 나는 여전히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다. 중세 덕후라는 말은 취소해야겠다. 중세 덕후라기엔 나는 너무 아는 게 없다. 소박하게 중세 덕후를 지향하는 덕후라고 해두자. 그의 또 다른 소설인 ‘전날의 섬’도 재미있었다. 그러나 역시 르네상스에 대해 아는 건 ’ 대항해 시대‘ 밖에 없는 나에겐 어려운 소설이었다. 대항해 시대도 게임 때문에 알게 된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게임의 유익한 점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움베르토 에코에 대해 아는 거 없고, 읽은 거 없는 나지만 에코가 좋은 이유에는 리코더가 많은 지분을 차지한다.


‘리코더와 움베르토 에코’

이 얼마나 낯선 조합인가.

그러나 에코의 에세이를 모아놓은 책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읽은 사람에게는 익숙할 수도 있다. 이 냉소적이며 그래서 재미있는, 그리고 역시 어려운 책에는 리코더가 등장한다. 물론 리코더에 대한 언급은 얼마 없다. 그래도 나 같은 리코더 종사자는 반갑기 그지없다. 에코는 평소 리코더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리코더에 대한 글은 많지 않다. (하지만 리코더와 관련이 있는  소설이 있긴 하다.) 그렇기에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그의 이 에세이는 참 소중하다.

움베르토 에코와 리코더. 출처: https://www.reddit.com/r/Recorder/comments/nsh1ut/umberto_eco_with_his_recorders/

위 사진을 보면 에코는 리코더 연주를  매우 즐겼던 것 같다. 어쩌면  그는 서재에서 작업하다 휴식할 때 리코더를 연주하지 않았을까? 그의 뒤로 보면대가 보인다. 그  위에는 리코더 좀 불어본 사람이라면 낯익은 오렌지색 악보가 눈에 띈다. 물론, 여러  악보를 겹쳐 놓은 것도 음악 연주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할 것이다.(악기 연습을 할 때는 이곡 저곡 늘여놓는 법이다.) 이 사진으로는 그가 펼쳐놓은 악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반 에이크나 텔레만, 로이예의 악보도 있었을 것이다. (사진에서 에코의 표정이 조금 지쳐 보인다. 당장 리코더를  불고 싶은데, 작업 때문에 못해서 그런 게 아닐까 제멋대로 상상해 본다.ㅎ)



‘축구 이야기를 하지 않는 방법’

이것은 리코더가 등장하는 에세이의 제목이다. 에코의 글은 어렵다. 나 역시 “매스미디어의 <계시>에 힘입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에 길들어 있는 사람들”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짧은 에세이는 나에게 기쁨을 준다. 왜냐고? 그야 리코더가 나오니까^^. 이해하기 어려운 에코의 글이지만, 이 글은 이해할 수 있다. 이야, 이렇게 기쁜 일이! 드디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에코의 글이 하나 생겼다. 나는 이 에세이를 이해하기 위해 리코더를 전공했나 보다. 에코는 축구광의 태도가 얼마나 어이없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리코더를 소환했지만 실패했다. 세상은 다양하고 에코만큼이나 리코더에 관심 있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이 에세이에는 리코더와 관련된 내용에 각주가  달려있다. 리코더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은 각주를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래도 약간의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그래서 이 에세이를 이해하기 위해 리코더를 전공한 내가 살짝 설명을 보태본다.


이 글에서 에코는 리코더를 연주할 줄 아노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실력이 점점 나빠진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말해주는 이는 <루치아노 베리오>이다. (역시 월클 아마추어 리코더 연주자다. “님, 리코더 실력 떨어지고 있음. “이라고 말한 사람이 월클 작곡가라니.)그럼 루치아노 베리오는 누구인가?


루치아노 베리오 Luciano Berio(1925-2003)
이탈리아 작곡가. 초기에는 음렬을 이용한 곡을 작곡했고, 후에는 전자음악으로 옮겨갔다. 독주 악기들을 위한 ‘세퀜차 Sequenza 시리즈’, ‘신포니아’가 특히 유명하다. 사람의 목소리와 악기 자체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독특한 음악 세계를 만들었다.

다음은 ‘객석’의 루치아노 베리오 관련 기사이다. 작곡가와 그의 작품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와있다.
https://auditorium.kr/2018/07/루치아노-베리오-이탈리아-근대-음악을-이끌다/ ​


글 속에서 에코는 기차 안에서 맞은편 승객과 대화를 나누는 상황을 가정한다. 에코가 승객에게 한 인물을 언급한다. 바로 <프란츠 브뤼헨>이다. 그는 네덜란드 출신의 리코더 연주자로, 리코더뿐 아니라 지휘자로도 활동했다. 리코더의 예술성과 대중성을 폭넓게 끌어올린 연주자로, 리코더계의 영원한 스타이다.

루치아노 베리오는 프란츠 브뤼헨에게 곡 하나를 작곡해 준다. 바로 리코더 솔로곡 ‘게스티 Gesti'이다. 이 에세이에 게스티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기왕 두 대가가 나왔으니 이 곡에 대해서도 잠깐 이야기해 볼까 한다.


게스티 Gesti
프란츠 브뤼헨이 루치아노 베리오에게 의뢰하여 작곡된 알토리코더 곡. 1966년 작곡되었다.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한다. 오죽했으면 베리오가 브뤼헨에게 작품 원고와 함께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보다시피, 나는 당신의 손가락과 혀의 결별을 축하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리코더 연주 기술의 핵심 중 하나는 텅깅이다. 그리고 이 텅깅은 손가락의 움직임과 일치해야 한다. 그런데 손가락과 혀(텅깅)의 결별이라니... 여기에 호흡의 결별도 추가된다. 손가락과 혀, 호흡을 분리하고 자유자재로 조율해야 하는 것이다. 거의 베리오가 연주자의 뼈와 살을 분리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럼 한번 브뤼헨의 연주를 들어보자.


https://youtu.be/VYO35N3t1nQ


나는 이 곡을 하지 않았는데 들어보니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프란츠 브뤼헨은 이 곡을 ‘작은 세퀜차‘로 생각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베리오의 대표적인 연작 시리즈 세퀜차가 초절기교를 요구한다고 하니, 이 곡이 작은 세퀜차라는 브뤼헨의 표현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리코더 기법의 절대적인 세 요소인 호흡, 혀, 손가락이  초절정의 기교를 통해 악기와 연주자의 한계를 넘겨버리고 폭발시킨다. 자신의 한계를 돌파하고 싶은 분들께 연주를 추천한다.

(이 영상 초반에 짧은 인터뷰가 나오는데, 네덜란드어인 것 같다. 혹시 네덜란드어 해석 가능 하신 분 댓글로 남겨 주세요, alstublieft!)


다른 연주자의 게스티도 들어보자. Anna Stegmann의 연주이다. 영상이 참 재미있다.

https://youtu.be/PtaDpjpJ-3A

Anna Stegmann의 Gesti 연주 영상

여기서는  손가락과, 혀, 호흡의 분리를 넘어 연주자의 몸과 영혼이 분리된다. 연주도 멋지지만 참 유머러스한 영상이다. 계속 듣다 보니 내  영혼도 몸과 결별하는 느낌이 든다. 과연 베리오의 의도는 이렇게 실현되고 말았다.


그럼 다시 에세이로 돌아오자. 베리오와 브뤼헨 다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눈물의 파반>과 <반 에이크>이다. 음악, 특히 고음악, 그중에서도 리코더에 관심 없는 독자에겐 이해하기 힘든 단어들이다. 물론 맞은편 승객도 이해할 수 없다.


눈물의 파반 Pavaen Lachrymae
17세기 네덜란드 작곡가 야콥 반 에이크가 작곡한 리코더 독주변주곡.  원곡은 영국의 류트연주자 존 다울랜드 John Dowland(1563-1626)의   ’ 라크리메 Lacrime(또는 Flow my tears )‘이다.


야콥 반 에이크 Jacob van Eyck (c. 1590-1657)
17세기 네덜란드 음악가. 장님이었다. 카리용 carillon 연주자(카리용은 건반으로 연주하는 음정타악기이다.)이자, 작곡가, 리코더 연주의 대가이다. 그가 작곡한 리코더 모음집 Der Fluyten Lust-hof는 단일관악기 모음곡집으로는 유럽 역사상 가장 많은 양을 자랑한다. 당시 유행하는 노래를 반 에이크가 즉흥적으로 변주한 것을 필사가가 받아 적었고, 모음집으로 출판했다. ‘눈물의 파반’도 이 모음집에 수록되어 있다.


라크리메 Lachrymae( Lachrimae, lacrime)란 ’ 눈물‘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파반느 라크리메 Pavaen Lachrymae는 ‘눈물의 파반’이라는 뜻이 된다. 이 곡의 원작자인 다울랜드는  1596년 기악음악을 위한 '라크리메 파반느 Lachrimae pavane'를 작곡했다. 이후 1600년 런던에서 출판된 <The Second Booke of Songs or Ayres...>에 에어 Ayre인 라크리메 Lacrime가 수록된다. (에어 Ayre란 류트 반주가 있는 성악곡을 뜻한다.) 라크리메는 다울랜드의 가장 유명한 노래가 되어 유럽 전역에서 유행한다. 노래 초반 가사가 “Flow my tears fall from your springs...."로 시작되어 flow my tears라고도 많이 부른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다울랜드가 직접 가사를 썼다고 한다. 후에 다울랜드는 또다시 이 라크리메를 이용한 7개의 파반을 작곡한다. 이 곡들은 1604년 출판된 <Lachrimae, or Seven Tears......>에 다른 곡들과 함께 수록된다. 다울랜드의 한결같은 라크리메 사랑이 느껴진다.....

반 에이크는 이 유행곡을 리코더 독주곡으로 변주한다. 다울랜드의 라크리메는 서정적이고 우수에 찬 정제된 슬픔이 가득하다. 반 에이크의 라크리메는 리코더 특유의 투명하고 애잔한 음색이 테마를 따라 변주되며 확장된다. 다울랜드의 에어 라크리메와 반 에이크의 라크리메를 한번 들어보자.


https://youtu.be/u3clX2CJqzs

존 다울랜드의 라크리메

https://youtu.be/RwVqUDx26Cs

반 에이크의  파반느 라크리메. 예고없이 들리는 해설자의 목소리 놀람 주의.(난 놀랐음)


반 에이크의 라크리메는 앞서 나왔던 브뤼헨의 연주를 올렸다. 여러 훌륭한 리코더 연주자들의 연주가 많이 있지만, 구관이 명관이라고 나는 이 브뤼헨의 연주가 가장 마음에 든다. 브뤼헨 특유의 맑고 투명한 리코더 음색도 일품이지만, 그의 섬세한 곡 해석과 음악적 표현은 이후 많은 리코더 연주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다시 에세이로 돌아가서, 계속 이어지는 낯선 용어들을 살펴보자. <블록플뢰테>이다.  블록플뢰테 Blockflöte는 각주에 친절하게 ’ 리코더의 독일식 이름‘이라고 설명되어 있다(왠지 또박또박 읽어야 할 것 같다). 리코더는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예전에 이에 대한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관심 있는 분은 여기로.-> https://brunch.co.kr/@permusica/20 ​


자, 다음! <쿨스마>와 <뫼크>이다.

쿨스마 Coolsma
리코더 제작자 한스 쿨스마 Hans Coolsma가 만든 리코더. AURA시리즈와 Coolsma-Solo Recorder 가 있다.


뫼크 Moeck
독일의 리코더 제조업체. 악보도 같이 출판한다. 리코더 음악 잡지인 TIBIA를 발행한다. 아마추어용부터 전문 리코더 연주자용에 이르는 리코더 라인이 있는데 흑단으로 만든 리코더가 유명했다. 대체적으로 품질 좋은 우수한 리코더를 생산한다.
홈페이지: https://www.moeck.com/en/
​ ​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용어의 홍수 속에 에세이는 점점 더 점입가경이다. 리코더가 활로 켜는 악기냐고 묻는 승객에게 에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건 그렇고, <데르 둔 다프네 도버>의 5번 변주 정도는 들어보셨겠지요?”*

하하. 이건 정말 리코더를 모르면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이 대목에선 리코더 애호가들은 왠지 모를 짜릿함을 느낄 것이다.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에코는 실패했다.


데르 둔 다프네 도버 Derde, Doen Daphne d'over
야콥 반 에이크가 작곡한 리코더 독주변주곡. 앞서 나왔던 파반느 라크리메가 수록된 모음집 <Der Fluyten Lust-hof>에 수록된 곡이다. 이 모음집에는 총 3개의 다프네가 있다. 데르 둔 다프네 도버는 그중 세 번째 다프네이다. 이 마지막 다프네의 5번 변주는 전문 연주자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 어려운 기술을 요구한다.


< C >보다는 < F >?

이제는 심지어 암호 같은 C, F가 등장한다. 그래도 이건 초등학교 때 리코더를 배운 기억을 떠올리면 금방 해독할 수 있다.

C조 리코더 : 제일 낮은음이 C, 즉 ‘도’로 시작하는  리코더. 대표적으로 소프라노, 테너 리코더가 있다.
F조 리코더: 제일 낮은음이 F, 즉 ‘파’로 시작하는 리코더. 대표적으로 알토, 베이스 리코더가 있다.

(이와 관련된 글 역시 예전에 쓴 적이 있다.  https://brunch.co.kr/@permusica/22​  ​​ ​ 참조.)


반 에이크의 곡을 리코더로 불 때 주로 C조인 소프라노 리코더로 연주한다. 그러나 F조인 알토 리코더도 많이 쓰인다. 알토 리코더가  소프라노 리코더보다 음역이 낮아서 듣기 편하다. 그래서 에코는 F가 더 듣기 좋다고 말하는 것이다.


파르마에 간다는 사람을 붙잡고 에코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간다. <뢰이예>와 <텔레만의 환상곡들>이란 단어가 이 불운한 승객의 머리를 어지럽힌다.

에코가 말하는 뢰이예가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뢰이예에 대한 주석이 달려있기는 하지만 아쉽게도 부족하다. 에코는 지금 리코더에 대해 말하는 중이다. 리코더에서 가장 유명한 뢰이예는 Jean Baptiste Loeillet de gant이다.


Jean Baptiste Loeillet de gant (1688-c.1720)
벨기에 겐트 Ghent 출신의 플랑드르 작곡가. 런던에서 활동한 사촌 Jean Baptiste Loeillet of London과 구분하기 위해 뒤에 gant(또는 Ghent)를 붙여 Jean Baptiste Loeillet de gant라고 부른다. Loeillet of London의 동생  Jacques Loeillet도 역시 음악가이다. 이 세 뢰이예는 모두 리코더를 위한 곡을 작곡했다. 하지만 그중 Loeillet de gant이 가장 많은 리코더 소나타를 작곡했다. 현재 48개의 솔로 리코더 소나타 곡이 전해지며, 이 소나타 중 6곡은 익명의 편곡자에 의해 리코더 듀엣곡으로 편곡되었다. 당시 Loeillet de gant의 리코더 곡은 인기가 많아  암스테르담에서 최초로 출판된 후에  런던에서 재판되기도 했다. 그의 곡은 현재까지도 인기 있는 리코더 레퍼토리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에코가 찾았다는 뢰이예의 소나타가 매우 궁금하다. 어떤 곡인지도 좀 말해줬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쉽다. 그럼 다음 텔레만으로 넘어가 보자.


게오르그 필립 텔레만 Georg Philipp Telemann (1681-1767)
독일 마그데부르크에서 태어난 독일 후기 바로크 작곡가. 독학으로 리코더, 오르간, 바이올린 등 다양한 악기를 익혔다. 4천여 곡이 넘는 다양한 작품을 남긴 텔레만은 리코더를 위한 작품도 많이 작곡했다. 특히 리코더 콘체르토와 솔로 리코더 소나타는 현재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텔레만은 원래 법학을 전공했다.(유명한 음악가 중 이런 경우가 제법 많다.) 그러나 넘치는 음악적 재능으로 모든 악기와 작곡 기법을 독학하고 음악가로서 당대 최고의 명성을 떨친다. 그는 리코더를 잘 알고 있던  작곡가였다. 그의 작품에서 리코더는 밝게 빛난다. 리코더의 음색과 기법을 최대치로 끌어내어 작곡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 에코가 말한 텔레만의 곡은 <환상곡>이다.  이미 환장할 것 같은 승객은 어쩌면 열차의 비상 제동 장치에 손을 가져갔을지도 모른다.


환상곡 12 Fantasias
텔레만이 1732년~1733년 경에 작곡한 플루트 솔로곡.  모두 12개의 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리코더로는 조옮김해서 연주한다. 지금도 리코더의 주요 독주 레퍼토리 중 하나이며, 아름답고 서정적이고 매우 어려운 곡이다.


텔레만의 환상곡은 리코더로 연주해도 아름다운 곡이다. 에코는 이 곡도  즐겨 연습하지 않았을까? 물론 바로크식 운지법으로.


마지막으로 <독일식 운지법>과 <바로크식 운지법>이 등장한다. 아마 리코더를 잘 모르는 사람도 이 단어는 익숙할 것이다.

독일식 운지법
20세기 초반 피터 할란 Peter Harlan이 개발한 운지법. 일부 저음을 쉽게 연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고음으로 올라갈수록 오히려 운지가 복잡해진다. 이 운지법을 적용하면 리코더를 저렴하게 대량생산 할 수 있다. 독일 나치당이 부상하면서 음악과 교육을 통제한 이후 정규 교육에 사용되었다. 대체적으로 이 운지를 쓰는 리코더는 품질이 낮아서 전문 연주에는 쓰이지 않는다.

바로크식 운지법
영국의 칼 돌메치 Carl Dolmetsch가 개발한 운지법. 대부분의 대량 생산 되는 리코더뿐 아니라, 개인 공방에서 만드는 리코더에도 이 운지법이 많이 사용된다. 현재 이 운지법이 리코더 운지법의 표준을 이루고 있다.


나치와 독일식 운지법이 이런 관계가 있었다니....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축하 행사에 리코더 연주가 포함되었다고 한다. (베를린 올림픽은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1위, 남승룡 선수가 3위를 했다. 그러나 일본 식민지배 하의 출전이라 일장기를 달아야 했던 비운의 올림픽이었다.)그리고 그때 이 연주를 본 사람 중 사카모토 요시타카라는 일본인이 있었다. 연주는 어린이들의 리코더 합주였고 이 연주를 인상 깊게 본 요시타카는 리코더가 교육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일본으로 가져간다. 이후 일본에서 대량 생산되고 학교 교육에도 사용된다. 우리나라의 초등학교 리코더 교육도 이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요즘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독일식 운지법과 바로크식 운지법 둘 다 실려있다고 한다. 독일식 운지법이 교육에 유용하거나 더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학교 교육에서도 독일식 운지법은 과감하게 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질 낮은 대량생산에나 적합한, 몰개성적인 독일식 운지법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에코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BMW는 대단한 차다... 그리고 에코의 말을 듣고 있던 이 불운한 승객은 비상 제동 장치를 잡아당긴다.



에코의 의도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에세이를 읽고 축구광에게 붙잡힌 에코의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이 글을 읽은 어느 축구광은 자신의 과거를 반성했을 수도 있다.(물론 그 축구광이 리코더광일 가능성도 있다.) 나는 이 글을 쓴 에코의 목적과는 상관없이, 에코가 가진 리코더에 대한 깊은 애정과 지식을 느낀다. 그 애정이 얼마나 깊냐면, 몰타 기사단에게 기사 제안을 받지만 그 대신 ‘이탈리아에 하나밖에 없고 사이비가 아니며 역사가 오래되고 모두에게 인정을 받고 있는’ 이탈리아 리코더 협회를 선택할  정도이다.(“몰타 기사단의 기사가 되는 방법 “중) 시간이 너무 없어서 1년에 182시간이 필요한 담배(에코의 담배사랑은 유명하다)는 끊을지언정, 리코더 연주할 시간을 끊는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이러니 내가 안 좋아할 수 있는가.



이탈리아의 한 음악잡지. 에코의 인터뷰가 실려있다.


정말 애석하게도 에코의 리코더 연주 영상은 찾지 못했다. 베리오가 조금만 덜 솔직하게 에코의 연주 실력을 평가해 줬다면 오늘 우리는 그의 리코더 연주 영상 하나쯤은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리코더를 잡고 있는 에코의 사진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 본다.  혹시 모른다. 에코가 자신의 연주가 담긴 음원이나 영상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보관하고 그의 글 속에 보관 장소를 암시해 놓았을 수도 있다.




*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중 139p 인용/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 열린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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