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기구 타는 것을 그다지 선호하지는 않지만 익스트림 스포츠는 좋아하는 나는 '스릴감'을 몹시 사랑한다. 일상에서 느끼지 못하는 색다른 감정이랄까. 익스트림 스포츠의 끝판왕이라 생각하는 스카이다이빙은 아직 해 보지 않았지만 난이도가 꽤 높은 번지점프는 해 봤다. 멕시코 교환학생 시절, 수풀이 우거진 숲을 향해 뛰어내렸다가 뱅글뱅글 돌다가 허공에서 줄을 잡고 올라와야 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나 이러다 죽으면 어쩌지?' 하는 아찔한 감정을 느꼈다. 차라리 그냥 뛰어내리는 번지점프였으면 괜찮았을 텐데 줄을 잡고 다시 올라가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허공을 자유롭게 느낄 여유가 없었다. 같이 어울렸던 한국인 8명 중 겁 없는 나만 뛰어내려서 유럽애들이 '코리안 브레이브 걸'이라며 환호했던 소리만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다시 내게 번지점프를 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절대 하지 않을 것 같다. 그때보다 나이를 먹어서일 수도 있을 것이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스카이다이빙도 해 보고는 싶은데 죽을까 봐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내 생각은 20대에 멈춰있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가끔은 내가 늙었다고 인지할 때가 이런 순간 같달까. 무턱대고 들이대는 막무가내 정신과 깡다구가 조금은 옅어지고 있달까.
사실 한국에서는 얌전하고 조용히 살아야겠다 생각하지만 외국을 나가면 내 기질이 과감 없이 발현된다는 걸 이번 여행에서 명확하게 느꼈다. 한국사회는 다소 경직되어 있고 위계질서가 공고하며 보수적이기에 자신과 조금 다른 사람을 보면 '틀렸다'라고 규정하기 일쑤다. 물론 요즘 MZ들이 하나둘 조직에 들어오면서 딱딱한 조직 문화가 바뀌고는 있다고 하지만 조직문화가 바뀌기 위해서는 30년 이상 걸릴 거라고 본다. 사실 MZ라고 낙인찍는 것 자체가 MZ를 존중하기보다는 '너네 굉장히 특이하구나?' 하고 비웃는 느낌이랄까. 물론 나 역시 나이가 들면 꼰대로 변할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미 꼰대 기질이 다분할는지도 모른다. 사족이 너무 길었다. 어찌 되었든 이번 여행에서도 꿈틀거리던 자유분방함을 마음껏 발현했는데 그중 하나가 '패러세일링'이었다.
재작년에 말레이시아에서 제트스키를 타고 대실망했던 터라 실망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있었지만 왠지 푸르른 바다와 하늘 사이에 둥둥 떠 있으면 환상적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콜롬비아 산힐에서 했던 패러글라이딩을 하면서는 스릴감보다는 안정감을 느꼈던 터라 놀이기구 타듯이 타는 패러세일링은 더 스릴이 넘칠 것만 같았다. 사실 패러세일링 선택지 자체는 본섬이 더 많았고 가격도 합리적이었지만 1200피트까지 올라가는 게 코나밖에 없어서 코나에서 하기로 했다. 9시 반쯤 모여서 크루한테 이런저런 설명들을 듣다가 9시 50분쯤 배를 타고 패러세일링을 하는 곳으로 향했다. 나는 뱃멀미를 하는 편이어서 인천공항 약국에서 멀미약을 미리 사서 들고 갔다. 실제로 뱃멀미를 심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패러세일링을 하고 내려올 때부터 약간 어질어질했다. 우리는 라틴 계열의 미국인(조상이 멕시칸일 것으로 추정) 가족 5명과 함께 배를 탔다. 미국인 가족은 고프로로 사진과 영상을 찍는 듯했고 우리는 평소에 안 쓰는 아이폰으로 영상과 사진들을 찍어뒀다. 실제로 크루들이 사진을 찍어줬는데(물론 절대 무료가 아니다. 역시 자본주의 끝판왕 미국!) 사진들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돈을 지불하고 살 정도는 아니었다. 상공에서 우리가 직접 찍어둔 사진과 영상들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아이들 3명, 부부 2명, 우리네 2명 이렇게 각각 10분씩 패러세일링을 했는데 정말이지 좋았다. 일단 바다 때깔 자체가 너무 푸르러서 감탄사가 나왔다. 바다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푸른 블랙홀에 빨려 들어갈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연의 위대함과 거대함을 느꼈다고나 할까. 이러한 대자연 앞에서 나는 한낱 미물에 불과하구나 싶었다.
그렇게 10분 동안 상공에서 평화로움을 느낀 다음, 현지인 추천 버거맛집 <오노 로아 그릴>에 갔다. 이 역시 지난밤 내가 열심히 구글링을 해서 얻은 맛집이었다. 상대적으로 한국인이 많이 갔던 <얼티메이트 버거>와 <오노 로아 그릴> 사이에서 고민했으나 <오노 로아 그릴>이 YELP 어플에서 미국 내 8등 맛집으로 꼽혔다고 해서 그곳으로 향했다. 치즈버거가 메인인 곳이니 기본 버거와 BBQ 치즈버거를 시키고 사이드로 어니언링과 감자튀김을 시켰다. 일단 패티가 두꺼웠고 불향이 나서 정말 좋았다. 사실 하와이에서 먹었던 햄버거 탑 집은 본섬 <치즈버거 인 파라다이스>였지만 <오노 로아 그릴> 역시 나쁘지 않았다. 우걱우걱 버거 하나를 다 먹고 미리 알아봐 둔 HICO 커피에 가서 우베라테를 마셨다. 빅아일랜드는 커피도 유명하지만 고구마도 유명하다고 한다. 존맛탱까지는 아니었지만 색다른 커피 맛이라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커피의 맛을 음미하다가 Magic Sand Beach Park에 들러서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심신을 안정시켰다.
애초에 우리는 둘째 날에 마우나 케아 산에 오르려고 했는데 산 근처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다음날로 미루고 플랜 B로 가야 했다. 사실 명확한 플랜 B가 있다기보다는 남편 머릿속에 이거 저거 하면 좋지 않을까 정도의 것들을 하나하나 하기로 했다. 일단, 무작정 Greenwell Coffee Farm에 갔다. 커피농장 투어를 하는 곳이 여러 곳이 있지만 이곳이 무료로 1시간가량 투어를 해 준다고 해서 갔는데 때마침 2시부터 투어를 하고 있길래 투어 무리에 합류했다. 유쾌하게 투어를 진행하는 아저씨와 호응하는 미국인들을 보며 미국 드라마 속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은 느낌마저 받았다. 한국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빨리빨리'라면 미국인들 하면 연상되는 이미지는 '조킹'이 아닐까 싶다. 커피투어가 끝나고 나서 여러 커피를 시음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막 끌리는 커피가 없어서 원두를 따로 사지는 않았다.
그렇게 투어를 후다닥 끝내고 남편은 푸우혼우아 호노노 국립역사공원에 가자고 했다. 역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는 달갑지 않았지만 일단 남편이 가보자고 해서 오케이 하고 구글링을 시작했다. 이것저것 검색하다 보니 우리의 목적지 푸우혼우아 근처에 스노클링으로 유명한 Two Step Beach가 있는 게 아닌가! 노란 열대어를 많이 볼 수 있다며 남편에게 스노클링을 하러 가자고 했다. 한국인 후기 중에서도 스노클링 스폿 중에 단연 탑으로 꼽는다는 후기가 심심치 않게 있었던 터라 기대감에 부풀었다. 스마트키가 바닷물에 젖어서 보험사 부르고 했다는 섬뜩한 후기를 보고는 아차 싶었다. 짐을 둘 곳이 없으니 각자 들어가서 스노클링을 해야 하지 않나 싶어 한 명씩 들어가기로 했다. 수영을 잘하는 남편은 혼자 들어가더니 요리조리 헤엄치다가 수중에서 물고기 사진을 찍어오기까지 했다. 바다 수영은 너무 오랜만이라 주저하던 나는 처음에 짠내를 마시고 으웩 했다. 입으로만 숨을 쉬어야 하는데 코로 숨을 쉬니까 틈 사이로 바닷물이 들어와서 괴로웠다. 그러다가 조금 요령이 생겨서 바닷물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아서 노란 열대어들 사이를 유유히 헤엄쳤다. 그래도 짠내가 내 온몸에 뱄던 터라 너무나도 찝찝했다. 1시간가량스노클링을 즐기고 나서 짠내를 씻어낼 샤워실을 찾는데 샤워실이 없었다. 사실 나는 짠내 그대로 가도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남편은 씻어야 한다며 구글링 해서 샤워실을 찾아냈다.
Hikiau Heiau 근처 샤워실이었는데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었던 터라 사람도 거의 없었다. 물만 나오는 공용 샤워실에서 물로 헹궈내는데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게 아닌가. 한적한 곳에서 바람이 온몸을 휘감는데 어제에 이어 '천국인가' 하는 감정을 또 느꼈다. 날씨가 어찌 이리 좋을 수 있나 싶어서 돌담에 누워서 우두커니 하늘만 바라봤다. 정말 기분이 째질 듯이 좋았다. 감정을 담아둘 수 있는 기계가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을 담아서 두고두고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랄까. 감정변화가 크게 없는 남편도 어제 일몰에 이어 지금 이 순간이 정말 좋다고 했다. 예상치 못했던 순간이어서 더 좋았던 것 같다. 애초에 스노클링을 할 생각도 없다가 스노클링을 했는데 스노클링 자체보다 샤워를 하고 나서 크나큰 희열감을 느꼈달까. 굉장히 오묘했다.
그렇게 Hikiau Heiau에서 날씨를 만끽하다가 구글링 해서 발견한 Choice Mart에 가기로 했다. 무스비와 포케가 유명하다고 해서 갔으나 무스비는 모조리 품절이었고 포케 몇 개만 남아서 포케만 테이크아웃했다. 그 외에 우리의 애정템 제로콜라, 빅웨이브 맥주, 고구마칩, 감자칩 등등을 사서 <블랙락 피자>로 향했다. 시그니처 피자인 클래식 콤보를 시킨 후, 근처 <Shaka Tacoz>에 걸어가서 피시 타코 3개를 시켰다. 상대적으로 고도가 높아서인지 이곳에서는 갑자기 보슬비가 왔는데 비를 맞으면서 걷는 것도 정말 행복했다. 어스름한 산기슭에 햇빛 한 줄기가 비치는데 조명마저 누르스름해서 굉장히 몽환적인 광경이 연출되었다. 우리는 타코를 테이크아웃했지만 <Shaka Tacoz>의 뷰가 환상적이라 이곳에서 먹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음식 두 개를 테이크아웃해서 맛있게 먹고는 저녁 9시쯤 숙소에 도착했다.
정말 완벽한 하루라고 생각했는데 말썽꾸러기인 내가 또 사고를 쳤다. 와인잔을 꺼내다가 그걸 깨뜨리고 만 것이다. 기물파손죄로 얼마가 청구될까 조마조마하니 남편이 차라리 걱정하지 말고 프런트에 전화를 해 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새 와인잔이 필요하냐고 묻더니 하우스키퍼를 시켜서 와인잔을 새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하우스키퍼는 굉장히 빨리 왔고 나는 미안해하며 깨진 와인잔을 건넸다. 십년감수했다며 헤헤거리다가 우리는 그렇게 단꿈에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