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세세한 계획은 전날밤에 짜는 식으로 여행을 해 온 우리는 전날밤에 그 다음날 계획을 대충 짰다. 오전 느지막이 일어나서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다가 프라이빗 비치에서 스노클링을 하는, 그런 여유로운 계획을 머릿속에 넣고는 10시쯤 눈을 떴다. 뒹굴뒹굴거리다가 주섬주섬 래시가드를 입고서는 수영장에서 물장구를 치다가 썬배드에 누웠다. 무엇보다도 그냥 가만히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첫째 날과 둘째 날만큼은 아니지만 드넓은 바다가 한눈에 보이고 파아란 하늘이 동공을 가득 채우니 시간만 많으면 한 달이고 이곳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적거리다가 프라이빗 비치에 들어가서 스노클링을 했으나 바다거북을 볼 수는 없었다. 운이 좋으면 바다거북을 볼 수 있다길래 기대했으나 기대는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확실히 프라이빗 비치라 그런지 두 번째 날 스노클링했던 곳보다는 자갈이 적고 모래가 가득해서 무지 안전했고 상대적으로 꼬마들이 많았다. 평소 앉아있기보다 누워있는 것을 즐겨하는 우리는 프라이빗 비치 앞 썬배드에 누워서 한참을 한량처럼 있다가 배가 고파질 무렵, 차를 타고 현지인 맛집 <The Fish And The Hog>로 향했다.
구글맵에 내가 찾아둔 맛집은 무수히 많았지만 동선을 고려했을 때, 제일 합리적인 곳이 이곳이었다. 셋째 날 우리의 목적지는 '마우나케아 천문대'였기에 이곳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The Fish And The Hog>를 들르기로 했다. 웨이팅을 길게 한다길래 오픈 시간에 맞춰가려고 했으나 둘 다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1시 30분 정도 도착했다. 30분을 기다려야 한다길래 뜨악했으나 어쩔 수 없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기로 했다. 진짜 관광객은 하나도 없고 현지인들뿐이어서 더 기대를 했던 것 같다. 식당에서 줄 서면서 굉장히 미국 시트콤스러운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웨이터언니가 "Who's The Joe?" 하며 명단에 있는 Joe를 찾는데 없는 게 아닌가. 그랬더니 아시아계 미국인처럼 보이는 아저씨가 "Can I Be The Joe?" 하며 농담을 했고 식당 밖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빵 터졌다. 남편은 그때 마우나케아 천문대에 전화를 하고 있어서 농담을 못 들었다. 나는 혼자 킥킥거리다가 저 아저씨가 유머러스한 농담을 던졌다고 전해줬다. '역시 미국인들은 참 유쾌해' 라고 생각하며 흐뭇하게 그 아저씨네 가족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우리 차례가 되어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맥엔치즈 브리스킷, 풀드포크 플레이트, 브러쉘볶음 이렇게 3개를 시킨 다음, 저녁에 산에서 먹을 치킨클럽 샌드위치, 쿠반 샌드위치, 바나나 크림 파이를 포장해 달라고 요청했다. 메뉴를 6개나 시켰으니 얼마가 나왔을 것 같은가. 팁 포함 19만 원가량이라 첫날에 비해 저렴했지만 음식 퀄리티는 여전히 첫날이 압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지인 맛집으로 유명한 이곳은 물도 무료였고 남은 음식은 포장해 가라고 친절하게 포장용기도 줬다. 물론 우리가 엄청 많이 시켜서 친절했던 것일 수도 있으나 미국의 전형적인 펍같은 느낌도 나서 좋았다.
기분 좋게 식사를 하고는 인근 마트인 KTA 마트에 가서 마카다미아, 초콜릿, 물, 고구마칩, 스타벅스 커피 등등을 샀다. 더불어, 기름을 풀로 채워야 해서 1갤런당 5.329달러인 비싼 주유소에서 토털 7.043갤런을 주유했다. 산에 올라가기 직전에 Visitor Center에서 기름이 절반 이상인지 확인한다고 했던 터라 기름이 60% 정도밖에 없었던 우리는 비싸게 주유할 수밖에 없었다. 산에 올라가기 직전에 기름이 절반이상인지 확인하기 때문에 60프로였기에 50프로가 될 걸 대비해서 어쩔 수 없이 비싸게 주유했다. 똑같은 빅아일랜드라도 힐로에서는 1갤런당 4.79였기에 굉장히 비싸게 주유했던 것이다. 기름을 넣고는 1시간가량 달려서 Visitor Center에 도착했다. KTA 마트에서 보슬비가 내리길래 걱정했는데 마우나케아 천문대 쪽 날씨는 그야말로 최상이었다. 구름보다 위에 있는 해발 4200미터 고지대라 그런지 쾌청했다. 인천공항에서 사뒀던 고산병약을 먹어서인지 나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남편은 약간 고산지대라 어떤 느낌이 든다고 했다. 실제로 나는 겁 없이 남미여행을 하던 시절, 해발고도 3600미터인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에서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때는 심지어 약 하나 복용하지 않았는데도 멀쩡했다. 해발고도 때문인지 관광객들은 기본적으로 Visitor Center에서 1시간가량 머물고 올라가야 했다. 1시간 동안 남편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식당에서 포장해 온 바나나크림파이를 나눠먹었다.
5시 반 정도에 안내요원의 이야기를 듣고 오프로드를 40분가량 올라가니 6시 10분 정도 되었다. 경량패딩을 입었음에도 추워 죽는 줄 알았다. 실제로 기압이 낮아져서 질소가 가득했던 과자봉지가 부풀어 올랐다. 봉지 속 기압은 그대로인데 바깥 기압이 낮아지기 때문이라는 남편의 설명을 들으며 과알못인 나는 읭 하며 부푼 봉지를 신기해했다. 이렇게 추울 줄 알았으면 옷을 엄청 따뜻하게 입고 왔을 텐데 하며 밖에 나가서 잠깐 사진을 찍다가 차 안에 들어왔다가를 여러 번 반복했다. 7시 6분 무렵, 일몰은 시작되었다. 첫째 날 호텔에서 본 인생 일몰에 비하면 그저 그랬지만 천문대가 나왔던 드라마 <삼체>가 떠오르기도 하면서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듯한 기분도 들어서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거의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7시 25분 무렵, Ranger가 이제 내려가야 할 시간이라고 경고해서 내려가기로 했다. 별 덕후인 남편은 별을 관측해야 한다며 어딘가에 차들이 모여있는 주차장을 발견하기 위해 애썼다. 실제로 차들이 모여있는 주차장에 도착한 우리는 그곳에서 의도치 않게 민폐왕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빌린 Jeep차가 문을 열 때마다 불이 세게 들어와서는 좀처럼 꺼지지 않는 것이었다. 빅 멘붕에 빠진 우리는 불빛을 없애려고 손으로 막아가며 안간힘을 썼지만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별덕후 아저씨가 너네 이렇게 방해할 거면 나가라는 식으로 말하길래 나도 민폐를 끼칠 의도는 없었다며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다. 불빛을 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남편과 나는 문을 따로 열지 않고 창문으로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했다.
사실 나는 천문학 문외한이지만 별에 진심인 남편은 좋은 사진을 건져보겠다며 난리였다. 그냥 가면 좋겠다는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남편의 취향을 존중하며 기다려주기로 했다. 뉴질랜드에서 남편이 남십자성이라며 이것저것 알려줄 때는 신기했지만 이번에는 사방팔방이 별무더기여서 크나큰 감흥은 없었다. 그건 남편도 그렇다고 했다. 드문드문 별이 보일 때는 어떤 별인지 찾아보는 게 재미있지만 검은 도화지에 별을 흩뿌려놓은 것 같은 느낌이라 얼떨떨했다고나 할까. 남편은 그래도 은하수가 보인다며 들떠했지만 사실 나는 크나큰 감흥은 없었다. 그렇게 1시간가량 별 사진을 찍고는 9시가 다되어서야 Visitor Center에 도착했다. 사실 Visitor Center에서도 별이 엄청 잘 보였지만 불빛이 있고 없고는 차이가 크기는 했다. 그렇게 룰루랄라 행복해하는 남편이 열심히 밤운전을 하여 숙소에 도착하니 10시였다.
덧, 한국인 분들 중에 4륜 구동 Jeep 차 빌리시는 분들 정말 많던데 저희처럼 민폐왕 되지 마시고 불빛 끄는 법 잘 알아보고 가셔야 천문덕후들에게 욕을 안 먹을 듯합니다. 천문덕후들 정말 무서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