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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Sep 10. 2020

누가, 왜, 황시목에게서 감정을 빼앗았나

비밀의 숲2: 한국형 히어로물의 탄생

비밀의 숲 시리즈, 새로운 '히어로물'의 탄생


우리가 지금껏 보아왔던 히어로들은 일반 사람의 성정에 차별적인 능력이 더해져서 탄생했다. 슈퍼맨에게는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이, 스파이더맨에게는 거미줄을 내뿜을 수 있는 능력이 그를 차별적인 영웅으로 만들었다. 

이제 여기, 한국 드라마에 등장한 히어로를 보라. 그의 이름은 황시목(조승우 분). 원편에서는 서부지검 소속으로 검찰 내부의 비리를 수사하는 특임검사였으며, 후속편에서는 춘천지검 원주지청 소속이지만 대검찰청으로 파견되어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이라는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걸려있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검사이다.

 

필자는 비밀의 숲 시리즈가 일종의 ‘히어로물’이라고 생각한다. 검찰에는 황시목(조승우 분)이라는 영웅이, 경찰에는 한여진(배두나 분)이라는 영웅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어떤 능력이 더해져서라기보다는 오히려 특정 능력을 배제하는 것에 가깝다. 능력을 더하고 더해 사회적 경쟁 속에서 살아남고자 모두가 노력하는 그 전쟁터 속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힘을 빼 버리는 주인공들을 보며 왜 필자와 애청자들은 희열을 느끼는 것일까. 

검찰에는 황시목(조승우 분)이라는 영웅이, 경찰에는 한여진(배두나 분)이라는 영웅이 존재한다.


게다가 그들은 비록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직업을 가지긴 했지만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에서 철저하게 하부 구조에 위치해 있다. 말 한 마디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득권과 달리 생각을 멈추고 손과 발을 움직여야 하는 자리에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느 영웅들과는 결이 다르다.  


황시목에게 부여된 아주 특별한 설정


드라마는 황시목에게 아주 특별한 설정을 부여했다. 어린 시절, 뇌에 생긴 이상으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황시목에게는 그래서 표정이 없다. 시간을 들여서 자신을 돕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범죄자들을 보았을 때의 분노, 내부적 비리를 직접 목도했을 때의 놀라움과 허탈함 등의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조승우라는 배우의 탁월함이 돋보인다. 감정을 내색하지 않는 것과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데 그 차이를 섬세하게 표현하는 것이 보인다.) 원편에서 한여진(배두나 분)의 도움으로 그나마 조금씩 감정을 되찾는가 싶더니 2탄으로 와서 다시 도로묵이 되어버렸다. 

드라마는 황시목에게 아주 특별한 설정을 부여했다.


이를 두고 애청자들 사이에서는 원편과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다는 의견들이 있었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황시목에게 일반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생기는 한, 우리가 지금껏 보아온 그의 ‘영웅스러운’ 면모가 같이 상쇄되어 버릴 위험이 있다. 


'관계의 늪'에 빠진 한국 사회


비밀의 숲2에서 처음으로 던진 화두는 바로 ‘전관예우’였다. 부유층의 인플루언서 커플이 ‘인생사진’을 남기고자 통영의 한 바닷가의 출입 통제선을 고의로 훼손했는데 그 지점에서 만취한 청년들이 통제구역인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아버지의 재력을 뒷 배경 삼아 그 인플루언서들은 판사 출신의 변호사를 고용하게 되고, 서부지검은 경찰에서 기소 의견으로 올라온 이 사건을 하루만에 ‘혐의 없음’으로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이 배경에는 부장판사를 지내고 퇴임한지 오래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변호사의 존재가 있다. 방금까지 법원에서 근무하던 분이 맡은 사건인데 이왕 인과 관계를 밝히기도 어려운 사건이니 일찍 종결시켜 버린 것이다.

이 배경에는 부장판사를 지내고 퇴임한지 오래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변호사의 존재가 있다.


황시목과 한여진은 공직 사회에서 흔히 ‘그러려니’하는 부분들에서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방금 언급한 ‘전관예우’ 문제에 있어서 핵심은 ‘감정’이 개입되지 않아야 할 그 지점에 ‘감정’이 개입되었다는 것이다. 한여진은 분노하지만 황시목은 침묵하며 차갑게 항거한다. 황시목이 여기서 더 두드러지는 이유는 감정이 과잉된 한국 사회에서 철저히 ‘타자’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오랜 한국 사회의 관행에 대해서 그는 이해할 능력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다.


비밀의 숲의 핫클립: 회식 중 퇴근


“내가 지금껏 검찰에 근무하면서 선배보다 먼저 가는 후배 검사는 본 적이 없어.”
“네. 그럼.”
그는 처음 만나 ‘관계’를 다져야 할 김사현(김영재 분)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뒤돌아 뒷모습을 보여주며 차분히 사라진다.


그는 처음 만나 ‘관계’를 다져야 할 김사현(김영재 분)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뒷모습을 보여주며 차분히 사라진다. 그에게는 처음 만나게 된 선배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동기가 애초부터 없다. 그러한 ‘관계’나 상사들과의 ‘감정 노동’에 매달릴 시간에 수사의 본질에 더 다가고자 노력한다. 그러한 황시목을 조직사회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오랜 시간동안 한국의 조직 사회는 ‘감정 노동’을 조직 생활의 본질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명시적으로 회사 홈페이지에다가 그렇게 써놓지는 않지만, 암묵적으로 누구나 동의하는 명제. 그것은 ‘일’보다는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일은 실수해도 만회할 수 있지만 관계는 한 번 어그러지면 되돌릴 수 없다. 그렇게 주니어들의 꿈과 소신은 ‘관계의 늪’에 빠지게 되고, 주니어가 시니어가 되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될 즈음이면 이미 그들은 현실과 타협한 후가 되어버린다. 



감정이 결핍된 영웅의 탄생, 황시목 비긴즈(Begins)


어쩌다 감정을 배제한 영웅이 등장했을까. 아니, 오죽하면 작가는 황시목에게서 감정을 빼앗아야만 했을까.


‘비밀의 숲’은 난세(亂世)의 영웅을 제시하기 위해 고민했을 것이다. ‘관계의 늪’에 빠진 한국사회. 언론과 정치권이, 사법기관과 재계가, 입법부와 행정부가, 심지어 골목의 유흥업소 사장들과 경찰이 서로 ‘관계에 늪’에 빠져 신음하는동안 한국 사회는 점점 더 병들어간다는 작가의 문제 인식. 심지어 갈등 관계로 묘사되는 검·경에서조차도 수뇌부에서는 은밀한 연결고리와 거래가 발견되는 현실. 이 인식 위에서 결국 드라마의 작가는 ‘황시목’이라는 캐릭터를 탄생시키면서 그에게 감정을 배제시키지 않았을까. 누구라도 처음에는 소신껏 꿈을 펼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점점 조직 안에서 관계를 맺게 되고, 주변 사람들에게 감정 이입을 하면서 조직에 동화되게 마련이다. 80년대 불과 대학생의 신분으로 나라의 헤게모니를 뒤집었던 투쟁적 세력조차도 바꾸지 못한 것이 바로 한국의 조직문화이다. 작가로서는 역사 속에 영웅으로 탄생하지 못한 수많은 범인(凡人)들의 사례를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한 고민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얻어낸 결론, 어떤 이유로든 아예 감정을 배제시킨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황시목을 둘러싼 수많은 기득권들조차 황시목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후배 검사라도 어느 정도 감정이 통해야 컨트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득권의 컨트롤을 벗어난 감정결핍의 말단 검사는 조직의 아웃사이드에 존재하면서 ‘관계’에 서로 얽히고 섥혀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키맨’으로 떠오른다. 물론 ‘키맨’에게 권력이나 달콤한 보상이 부여되지는 않는다. ‘키맨’은 소모품처럼 사용되고, 드라마의 표현에 의하면 다 사용된 후에 ‘다시 서랍 속에 들어간다’. 하지만 권력에 크게 관심이 없는 그는 소모품의 자리에서도 크게 불만이 없다. 그저 수사의 본질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러고 나면 그 수사의 열매는 또 다른 기득권의 차지가 될 테지만 말이다. 


오죽하면 감정이 배제된 영웅을 탄생시켜야만 했을까. 이것이 비밀의 숲을 보면서 주로 드는 생각이다. 사회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그 현실과 관계의 벽을 무심하게 정면 돌파해나가는 황시목은, 비록 감정이 없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정 이입을 하도록 만든다. 


감정이 놓일 올바른 자리


감정과 관계는 사람과 사회에게 주어진 크나큰 축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왜 지극히 정상적으로 근무하는 검사를 ‘영웅(시청자 입장에서)’ 또는 ‘또라이(조직의 입장에서)’로 부르게 되는 것일까. 차가운 이성이 쓰여야 할 지점과 따뜻한 감성이 쓰여야 할 지점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된 문제가 아닐까. 차가워야 할 머리를 뜨겁게 하거나, 뜨겁게 해야 할 가슴을 차갑게 만들어버리는 순간, 사회는 점점 병들고 말 것이다. 


비밀의 숲 시리즈와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들


비밀의 숲은 이렇게 한국 사회에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는 대부분 황시목과 다르게 감정이 있고, 지켜내야 할 관계가 있다. 지켜내야 하는 것이 많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배우고 생각한대로 사회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러한 상상도 해본다. 황시목과 같은 사람들이 주류를 차지하게 된다면 어떨까? 

전관예우나 관계를 중요시하는 한국사회의 관행이 깨진다면 조직 사회는 더 나아질 것인가? 정(情)을 중심으로 운영되어왔던 한국사회에서 관계를 배제했을 때, 우리 사회는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 90년대생 이후의 '공정성 중시' 현상은 우리 사회를 더 진보시킬 것인가, 후퇴하게 만들 것인가?


* 사진 출처: TvN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배우고 생각한대로 사회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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