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 장학사가 오던 날을 기억하는가? 선생님은 안 하던 화장을 하시고 넥타이를 둘렀으며, 교실은 반짝반짝거릴 정도로 대청소를 했다. 교장실엔 화분이 올려지고 학교의 곳곳은 분주해진다.
선생님의 수업을 보여주시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흔쾌히 '네'라고 대답할 수 있는 교사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내 아이를 맡겼으면 당연히 수업을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장학이라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교실을 당연히 들여다봐야지?'라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당장 물어보라. '그래 언제든지!'라는 대답을 듣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현재의 '교육' 자체가 '모순'적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이 모순적 속성을 가졌다고?
조금 더 쉽게 풀어 설명해 보겠다.
요즘의 교실은 '학습자의 주도성', '개별화', '자율성' 등을 강조하고 있다. 전통적인 교육에서 행해졌던 교사의 일방적인 강의나 전달식 교육, 정적이고 통일적인 모습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말이다.
주입식 교육의 한계와 단점을 부각하며, 시대의 흐름에 맞게 교실도 변해야 함을 꾸준히 지적하고 있고, 교실도 꽤 많이 변하고 있다. 물론 '대입'이라는 목표아래 고등교육으로 갈수록 그러한 사조는 무뎌져가고 있지만 말이다.
여러분들이 수업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참관한다고 상상을 해보자. 참관자는 교육의 행위 자체를 먼저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즉, 말이나 행동이 일어나는 곳을 주시한다는 말이다. 교사의 말, 행동이 우선 눈에 들어올 것이고, 교사가 쓰는 판서나 제시하는 자료나 학습지 등을 관찰하게 된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학습자들의 말과 행동도 관찰될 것이다. 그것이 참여와 참관의 차이다. 그렇지만 입장을 바꿔 내가 교육에 참여한다면 말이 달라진다. 우리의 사고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수업을 액티브(Active)하게 활동적으로 구성하고 실천할 것을 요구받는 것은 참관자들의 관찰의 결과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열정적이고 지적인 교사의 설명이나, 교과와 관련된 개념으로 가득 찬 판서의 내용은 참관자들의 마음에 와닿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참관자들은 이미 다 알고 있거나 예상하고 있는 내용일 것일 테니. 특히 수준이 낮은 유아나 초등교육일수록 더욱더 그렇다. 기성인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저것을 설명하기보다는 학생들이 직접 찾게 해야지!, 학생들이 스스로 조사하고 토론하면서 정교하게 만들도록 해야지!, 교사가 다 알려주면 뭐 해? 학습자들이 듣지 않고 있는데'라고 판단해 버릴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인간은 아는 것이 많을수록 남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는 편이다.'
조금 옆으로 새서 이야기하면 필자가 가장 경계하는 말이 '내가 봤을 때는 말이야.... 내가 해봐서 아는데...'와 같은 나의 경험에 한정하여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아 오는 경우다. 더욱이 이러한 패턴은 더 뻗어 나갈 수 있는 대화의 범위를 한정 지어 버린다. 무심코 내가 이러한 습관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다시 수업을 참관하는 입장으로 돌아가보자. 한 시간 또는 그 이상의 수업을 보고 있으면 '각자 저마다의 관심과 이유'로 수업은 분석된다. 그래서 더욱더 공학적이고 틀림이 없으며, 객관적인 수업이 지향된다. 하지만 교육이라는 것 자체가 그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모호함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교육'이라는 현상 자체가 학습자의 자율과 주도성이 아니라 '규칙'과 '통제'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거슬러 올라가 '교육'은 어떤 필요에 의해서 인간들의 문화가 되었을까? 유추해 본다면 위와 같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수렵, 채집과 같은 생존에 필요한 기술에서부터 조상들의 이야기나 가문의 내력과 같은 역사와 정체성의 정립, 단체의 구성원으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이나 도덕적인 마음의 형성과 같이 '사회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근대로 오면서 더 많은 사회는 더 복잡해지고 분화되었으며, 생산에 필요한 기능과 기술의 전수를 목적으로 하는 교육은 더 필요로 하게 되었다. 계몽주의의 흐름으로 특별한 몇몇이 아닌 누구나를 위한 교육은 근대의 '학교'라는 교육만을 위한 특별한 기관을 만들어 냈고, 이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그곳에 보낸다. 지식과 정보는 넘쳐나고 어디서는 훌륭한 지식을 전수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기에 더욱더 학습자가 직접 참여하면서 발견하는 그런 수업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교육'자체가 그렇지 않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교사의 역할을 최소화하기를 요구하지만 학습자들을 가만히 내버려 둔 교실은 목적이 없이 표류하는 뗏목과 같이 변해버릴 가능성이 크다.
무엇이든 극단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교육'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학습자들의 자발성에 기인한 현상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수동적인 형편일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수동적 입장의 학습자를 목적을 가진 의도된 행위로 변화시키는 것이 '교육'을 규정하는 문장임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두 번째 교육이 가지고 있는 역설, 즉 패러독스는 그것의 역사가 개별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지금의 교실은 다수가 참여하는 단체학습이다. 교육은 특정한 누구(학습자)에게 어떠한 내용(교과)을 습득시키고 이해시키도록 하는 누군가(교사)의 의도된 행위다. 가족에서 부족으로 조금 더 시간을 달리하면 특정한 누군가만을 위해 맞춤식으로 교육은 이루어졌다. 고대나 중세에는 귀족들만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아니면 교육의 수요자가 강력한 동기를 가지고 접근한 도제식 교육을 떠올릴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의 교육은 누구나, 반드시, 특정한 시기에, 인정받은 곳으로 가서,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교과를 배워야 한다. 개별적 속성과는 거리가 먼 '대중을 위한 교육'이 바로 교육이 가진 두 번째 역설이다. 교실에 20명이 넘는(2019년 기준 초등학교 22.2명, 중고등학교 25명 내외) 학생들에게 개별화된 수준별 교육을 기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이상적인 이야기라고 바꾸어 말하고 싶다. 개개인의 경험과 기억이 다르고, 관심사와 흥미도 다르다. 학습에 대한 민감도도 여러 가지 변수에 따라 다르게 작용할 뿐 아니라, 그때그때 컨디션도 고려해야 한다. 어떻게 개별적으로 교육을 실현시킨다는 말인가? 단순히 정해진 문제를 풀 수 있고, 말고의 문제를 떠나 교과에서 요구하는 지식의 형식으로 한걸음 내딛고 그 영역 안에서 사고할 수 있는지? 교과와 관련된 사실적 지식을 알고, 그것으로 보다 큰 일반화된 지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는 조금만 깊게 들여다보면 판단 내릴 수 있다. 가장 정확한 것은 학생들의 리액션이나 사후 인터뷰를 통해서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그것을 한 장의 시험지로 규정짓는다. 성취기준에 도달했는지? 아닌지?
문제가 주어졌을 때 그 문제가 무엇인지 먼저 고민해 보라 했다. 결론적으로 자율성과 개별성이 없는 교육? 그 의문에 대한 모순점을 정리해보자. 첫째, 교육이라는 개념 속에 규칙과 통제의 의미가 담겨있다. 규칙과 통제가 있는데 자율성을 보여라고 한다. 둘째, 교육은 태생자체가 개별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무엇을 가르치느냐에 따라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지만 지식, 태도 등 마음의 형상을 다루는 교육은 더욱더 그렇다. 다수의 학습자들에게 개별성을 강조하는 교육은 이상적인 이야기다.
교육은 우리의 삶과 그 모습이 너무나 닮아 있다. 그래서 더 날것이고 그래서 더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교육에 기대를 건다. 기대는 예측과 같이 미래의 영역이다. 각자의 기준으로 재단하여 예측하고 기대한다는 것이 또 하나의 패러독스다. 그래서 교실을 보여준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의 교실을 바라볼 때 분명히 유념하면 좋겠다. '누구의 삶이 답이다' 할 수 없듯이 교육도 정해진 답이 없다는 것을...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시험성적을 올리기 위한'과 같은 분명한 목적에도 의문을 품어야 한다. 시험을 잘 치르면 그 교과에 대해 이해했다고 결론내릴 수 있는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효과적인, 효율적인, 올바르다고 합의할 수 있는 교육을 찾는다. 그것이 교육이 가진 또 하나의 패러독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