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았다곰 Nov 21. 2022

내 고향은 군부대 앞 동해운수 버스 종점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를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는 고향을 갖고 싶었던 적이 있다. ‘정지용’의 「향수」처럼 목가적이고 푸근한 어느 시골의 풍경이 고향인 촌부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나처럼 어설픈 도회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도시쥐’에게는 막연히 부러운 성장 배경이다.     


그런 어이없는 희망을 가진 원인은 우리 어머니셨는데, 어머니의 고향은 최근까지 하루에 버스가 1대 다니던 깊고 깊은 시골이다. 이름하여 ‘한적골’. 거기서 유년 시절을 보낸 어머니는 길가의 이름 모를 꽃과 풀, 나무까지 모르시는 게 없었다. 아는 척하기를 세상 제일 재미있는 놀이 삼은 내게 어머니의 자연 관련 지식은 세상에서 제일 그럴싸한 능력이었다.      


맞다. (혼자) 안타깝게도 나의 고향은 어느 군부대 앞 동해운수의 버스 종점이다. 무릇 고향이라 하면 아늑하고 푸근한 어딘가를 떠올리겠으나 내게 고향은 그런 심상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사회책 귀퉁이 어딘가에 적혀 있던 ‘이촌향도’ 현상은 나 말고도 수많은 현대인의 고향을 도시로 삼게 했지만, 그래도 나처럼 고향이 질투의 대상은 아니잖나.     


아무튼 내가 살던 곳은 버스 종점이 동네 어귀에 있던 탓에 하루에도 버스가 수백 번 드나들며 굉음을 내고 매캐한 매연을 곳곳에 퍼트려서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그뿐이랴. 당장 먹고 살 걱정에 환경 보호 따위는 시험지의 정답으로나 찾아볼 수 있던 시절이라 버스를 세차하거나 정비한 후의 온갖 오물과 기름 투성이 폐수를 근처 텃밭이나 둔덕에 그냥 쏟아내고 방치했다. 이미 더럽혀진 곳이라는 안심 덕분일까. 동네 어른들도 처치 곤란한 대형 쓰레기나 밤새 우릴 위해 뜨거웠던 연탄재부터 생활 쓰레기까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여기저기 버려대는 통에 동네는 지금의 친환경과 거리가 멀었다.     


맹자 어미의 걱정이 괜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거기서 놀았다. 하얀 빤스만 한 장 걸치고 온 동네를 휘젓던 내게, 온갖 고철과 플라스틱이 난무하는 종점 근처는 최고의 놀이터였던 셈이다. 나뿐만 아니라 온 동네 수많은 아이들이 그랬다.     


가끔은 다음 배차시간을 기다리는 기사 아저씨들의 휴게 공간에 놀러 갔다. 담배 연기가 가득한 그곳에서 운이 좋으면 “니가 기용이네 장남이구나?”라는 소리를 들으며 100원짜리 동전 몇 개 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지금도 현대인의 피로를 책임져 주는 ‘박카스’ 한 병을 손에 쥐고 나왔다. 설탕물을 음료 삼아 먹었던 우리에게 ‘박카스’의 오묘한 맛은 말 그대로 신세계였고,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가지 못하듯,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찾아오라는 심부름을 시킬 때면 자원해서 휴게실로 뛰어갔다.     


그리고 군부대가 가까이 있어 애국도 많이 했다. 소위 ‘삐라’라고 불리는 불온선전물이 동네 여기저기 널려 있었는데, 이걸 주워서 군부대 위병소에 가져다주면 학용품이나 건빵으로 바꿔주곤 했다. 가끔은 삐라가 가득 든 비닐봉투 따위를 줍곤 했는데, 그날은 노다지라도 캔 심마니마냥 신나는 날이다. 당연히 뭐가 들었는지 열어보진 못했으나 건빵 정도가 아닌 쌀이나 식료품 때로는 현금으로 교환해주곤 했으니 말이다.     


물론 고향에 대한 기억이 전부 이것뿐이겠냐마는, 네 고향이 어디냐 물을 때 아련한 기억에서조차 매연과 폐수 또는 ‘삐라’가 떠오르니 영 면이 서질 않아 그냥 얼버무리는 게 다반사였다. 하긴, 말해야 알아들을 사람도 없다. 서울 도심에서 밀리고 밀려난 사람들이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마지막으로 정착해서 살던 변두리 중 변두리였으니까.     


그래도 고향이라고 찾아갈 생각이 들었다. 너무 가난해서 힘들었던 시절이라, 특히나 꼴 보기 싫은 사람도 있어서 다시는 찾아갈 생각이 들지 않을 것 같았는데, 머리가 커지고 차가 생기니 한번 찾아가고 싶었다.   

  

찾아간 고향은 놀랍게도 그대로였다. 이럴 수가 있나. 벌써 삼십 년이 넘게 흘렀는데 그대로라니. 내 기억이 지도처럼 선명하기 때문이 아니다. 동네 어귀에는 종점 말고 사단급 규모의 군부대가 떡하니 버티고 있어서 건물 하나 고치는 데도 부대에 신고하고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란다. 어느 시인은 폐허가 된 고성터를 바라보며 하세월의 무상을 노래했다는데, 그 시인에게 우리 동네는 어떠냐 추천하면 좋았을 것을.     


헤맬 것도 없다. 머리가 아니라 다리가 기억하고 있으니. 삼 형제가 맘 놓고 꺼내 먹던 아이스크림 냉장고의 구멍가게도 그 자리에서 영업 중이었고, 차가 다니지 않아 바닥에 선을 그리고 오징어 놀이하던 신작로의 촉감도 그대로였다. 여러 집이 함께 세 살던 ㅁ자 형태의 공동주택도 걸려있던 옷의 주인이 외국인 노동자라는 것만 빼면 가난의 서러움까지 여전했다.     


돌아 나오는 길의 중국집이라도 다른 가게로 바뀌면 좋았겠다 싶지만, 더 말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맛은 그대로려나. 허기를 면하려 중국집에 들어가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던 그때였다. 무심코 주문을 받던 사장님이 고개를 갸웃갸웃 거리 더니 내게 다가왔다.      

“혹시……, 지웅이 아니냐?”

“어떻게? 아시죠? 그런데 누구……실까요?”

“나야, 나. 지환이. 나 누군지 모르겠어? 나, 깐돌이!”

“어?!?! 깐돌이! 야아! 니가 왜 아직도 여깄어!”

     

10살, 그러니까 초등학교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더운 여름날에 세간살이 몇 개 챙겨 도둑 이사로 고향을 떠났다. 10년이라는 시간은, 약간의 서울 말씨와 된장 말고 고추장에 고추를 찍어 먹는 식습관 외에 내 삶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강산이 변했다면 3번 넘게 변했을 시간이었는데, 날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니.     


어색하지만 둘은 꽤 오래 떠들었다. 깐돌이 어머니께서 우리 어머니의 소식을 무척 궁금해했다며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어머니들끼리 통화까지 했다. 두 분 모두 많이 우셨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나 싶어 중국집에서 나와, 외상으로 아이스크림을 사 먹던 구멍가게에 찾아갔다. 가게를 지키시던 사장님도 날 알아보시고는 가게 안쪽 방의 할아버지를 소환하셨다.     

“어? 누구래?”

“기용이네 첫째, 첫째. 세 머슴아가 맨날 우리 집 아이스크림 냉장고 문 열었잖아. 기억 안 나?”

“아, 기용이네? 니가 첫째라고? 몰라볼 수가 없겠네. 판박이야, 판박이.”     

역시 아버지와 통화를 하셨다. 그리고 역시 우셨다.     


나는 고향을 어떤 곳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고향은 뿌리니까. 내가 결국 돌아갈 곳이니까, 이왕이면 나무와 풀이 우거지고, 적당한 시점에 동물 소리 가득하며, 시냇물에서 고기 잡는 곳이면 좋지 않으려나. 그래야 고향답지. 그 정도는 돼야 어데서 고향 얘기할 때 들어 줄만 하지 않겠어?     


아니다. 이미 충분하다. 교가마다 등장하는 정기 가득한 산 하나 없고,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는 시냇물 대신 폐수 웅덩이에 발이 빠지는 곳이지만 그러면 어떠랴. 서른 살이 훨씬 넘은 아저씨의 얼굴에서 10살 꼬맹이의 앳된 모습을 발견하는 내 불알친구와 내 빤스 차림의 유년 시절을 기억해주는 구멍가게 아저씨와 아줌마가 계시지 않나. 그들 기억 속의 나는, 여전히 ‘기용이네 첫째 아들’이고, 여전히 날 반기는데, 그 말고 뭐가 더 필요할까.     


이제 네 고향이 어디냐 묻는다면 이렇게 답한다. 나의 고향은 군부대 앞 동해운수 버스의 종점이라고. 그곳에는 여전히 날 기억하고, 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눈시울 적시는 나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나 역시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작가의 이전글 가을이 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