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리 혼자가 아닌 ‘우리’가 만들어 낼 기적
꽤 오래전에 ‘사랑이 뭐길래’라는 드라마가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유선방송도 없던 시절이기도 했고, 최민수, 하희라와 같은 별 그 자체인 스타들도 기록적인 시청률의 견인에 한몫을 했으리라 짐작한다.
하지만 역대 최고의 인기 비결을 드라마 내용에서 찾는 사람들도 있다. 절대적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 몇 안 되는 드라마라는 점. 예나 지금이나 드라마에는 악마가 ‘성님’이라 부를 만큼 못된 악인이 반드시 등장한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악인 역할의 연예인이 뺨을 맞으면 그만큼 농익은 연기를 보여준 거라며 영광의 훈장쯤으로 여길 정도니 말 다했다.
나는 그런 악인이 불편하다. 그리고 반대급부로 반드시 등장하는 절대적 선인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선악의 대결 구도가 서사를 이끄는데 편하고, 권선징악이야말로 따뜻한 세상을 바라는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내는데 마침맞은 결말인 것도 잘 알겠다. 그러나 드라마가 사람들 사이의 불신을 부추기는 원흉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지나치다.
하지만 ‘사랑이 뭐길래’에는 그런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가부장 문화의 수호신을 자처하는 남자들과 반작용인 여자들, 동시에 한 가족의 구성원이기도 한 소시민들의 소소한 갈등과 해소가 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푹 빠져들었다. 얄미운 시아버지와 남편은 어디에나 존재했고, 마냥 순종했던 엄마와 새로운 세대의 며느리 역시 지금까지 흔히 볼 수 있는 역할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하디 흔한 역할이고 뻔하디 뻔한 이야기지만 공감했고 열광했다.
그런 점에서 영화,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은 30년 전 K-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와 닮았다. 절대악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답답하리만큼 선한 역할도 찾을 수 없다. 심지어 영화의 줄거리는 한 줄로 요약이 가능할 정도다. “155명을 태운 비행기가 강으로 불시착했으나, 전원 무사했다.” 끝.
물론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일 뿐, 사람들마다 반응은 다르다. 특히 NTSB(연방교통안전위원회)의 조사원들을 향한 분노가 많았다고 하는데, 실제로 ‘설렌버거’ 기장이 영화를 자문하던 중 NTSB의 조사원들이 악당처럼 묘사되는 데 반감을 느껴 등장인물의 이름을 모두 가명으로 바꿔달라 요청했다고 한다. 감독 역시 대결 구도가 가져다 주는 달콤함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던 것일까.
내 생각은 다르다. 이 영화에는 절대악 아니 시시껄렁한 악당조차 찾기 어렵다. 사고 조사원들은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오히려 그들의 최선이 더욱 다채로운 감동을 선사했다고 본다. 그뿐이랴. 조금 호들갑을 떨면 영화의 모든 등장 인물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보여준 최선의 퍼즐 조각들이 모여 감동의 물결을 자아낸다.
물론 감동의 수훈갑은 ‘설리’ 기장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노련한 기장의 명민한 판단과 대처가 아니었다면, 자칫 불의의 사고가 될 뻔한 불시착이 오히려 155명의 승객과 승무원 전원이 무사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부기장 예하 승무원들도 빼놓을 수 없다. 경력이 많다고, 비상 상황 시 대처 상황을 대비한 수백 시간의 교육을 받았다고 공포까지 학습할 수는 없었으리라. 하지만 불시착 직전까지 승객들에게 안전 수칙을 전파하고, 기체가 물에 가라앉는 순간에도 남은 승객들을 먼저 대피시키는 그들의 모습은 가히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교통 통제관, ‘패트릭’ 역시 ‘설리’ 기장에 못지않은 감동을 선사한다. 그는 레이더에서 신호가 끊긴 후에도 상황을 통제하려 노력했다. 결국 강으로 불시착했다는 무전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패트릭’의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은 영화를 너댓 번 보고서야 발견한 보물이었다.
짧지만 같은 장면에 등장했던 사람도 눈여겨 볼 만 하다. 사고 직후, 패트릭을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던 상관은 언뜻 보기에 냉정해 보인다. 그러나 할 일을 끝낸 ‘패트릭’을 교체해주고, 다음 절차를 설명하는 상관 역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다.
그 뿐인가. 비행기가 불시착하자마자 통근용 선박을 몰고 왔던 선장, 생명을 구하기 위해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거침없이 강물로 뛰어든 해경. 늦지 않게 출동한 소방관과 경찰들. NTSB의 면담을 마치고 나와 풀이 죽은 기장과 부기장을 영웅으로 치켜 세우던 택시 기사, 엄마 ‘브렌다’의 감사를 대신 전했던 인터뷰 도우미, 호텔을 다 드려도 모자르다던 호텔 직원 ‘메이’, 그리고 승객들이 모두 무사한지 불안해 하는 ‘설리’를 대신해 이젠 내게 맡기라던 동료와 추락 상황에도 승무원들의 지시를 따르며 서로를 구조한 승객들까지.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등장인물을 ‘설리’에 버금가는 영웅 아니던가. 이 중에 크기는 다를 수 있을지언정, 어느 조각 하나라도 빠진다면 155명 전원 구조라는 기적의 퍼즐을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눈에 띄는 대사들이 있다. ‘일’이다. “우린 할 일을 했다.” “최선을 다했다.” “그들도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자넨 할 만큼 했다.” 등.
그런 점에서 NTSB는 악당이 아니다. 그들의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결과가 선하다고 해서 과정 역시 선하리란 보장은 없다. 안타깝지만 현대에선 당연하다 여겨지는 절차와 수칙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피묻은 희생의 결과로 획득할 수 있었다. 이번 영화에 등장하는 비행사고 역시 155명 전원 구조라는 선한 결말로 끝났으나, 이대로 박수치고 사건을 마무리한다면 유사한 사고 발생 시 비슷한 기적을 위해 기도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결이 다르긴 하나, NTSB의 최선 역시 기적을 만들어내는 밑거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세상은 눈에서 광선을 뿜고, 하늘을 날며, 거미줄을 밧줄 삼아 건물 사이를 누비는 영웅들이 만들지 않는다.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자기 몫을 다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하나의 퍼즐 조각이 되어 커다란 그림을 완성한다. 그 중에는 화려한 색을 자랑하는 조각도 있고, 다른 조각과 구별되지 않을 만큼 평범한 조각들 있을 것이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모든 조각이 모여야 비로소 완성할 수 있는 그림인 것을.
나 역시 ‘설리’가 말했던 ‘우리’ 중 하나로 내 몫을 해낼 수 있길 간절히 바라본다.
It wasn't just me. It was all of us. All the passengers, rescue workers, air traffic control, boat crews, scuba cops. We did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