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디 부허의 작품과 함께 생각해보기
https://artlecture.com/article/3063
개인적으로는 페미니즘에 대한 약간의 편견을 가지고 있다. 왜 여성작가들은 이토록 억울함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는가. 억울함, 상처, 부당함, 억압, 강압, 폭력, 분노와 적대감 등에 대해. 여성작가들의 작품은 대체로 슬프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시대에는 멋있는 여성작가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한다. 작은 몸으로 거대한 거미조각을 만든 루이스 부르주아나, 국제적으로 보따리를 풀어내는 김수자 작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쿠사마 야요이나 아스네스 마틴, 조지아 오키프, 트레이시 에민, 제니 샤빌, 니키드 생팔, 바바라 크루거, 신디셔먼 외에도 사실 잘 모르지만 좋은 작업을 하는 여성작가들이 참 많다
‘잘 모르지만좋은 작업을 하는’
나도 모르게 내 뱉은 말과 함께 뒷통수를 치는 듯한 통계자료를 마주하며 놀란다.
Artsy통계 2022 아트시의 기사 중 2022년과 지난 10년간의 미술경매시장에서의 젠더간 비교한 통계수치, 여성예술가가 미술시장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다. 2022년에는 9.39%, 2012년부터 2022년까지 고작 6.8%를 차지하는 정도라니.
하이디 부허의작품들과 함께 생각해보기
스위스의 여성참정권
하이디 부허는 스위스의 여성예술가다. 스위스는 우리나라보다 여성 참정권이 늦게 획득되었는데 우리나라는 1948년, 스위스는 이보다 20년도 더 뒤인 1971년이었다. 앞선 미술경매시장의 수치와 함께 유리천장에 대한 수치로 그 현실을 좀 더 체감할 수 할 수 있었다.
<유리천장 지수>
<이코노미스트>가공개한 2022.03.07 유리천장 지수. 사진출처_
한겨례 2022.03.08 한국은 29위,스위스도 26위 만만치 않다. 북유럽 국가들이거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남성들이 만들어온 역사 속에서 여성들은 약자로써 많은 억압을 받아왔다. 스위스는 남성들이 생활하는 공간과 여성들이 생활하는 공간이 나뉘어져 있었다고 하는데, 대표적으로 남성들만을 위한 서재가 있었다고 한다. 부허는 집안 대대로 내려온 그 서재의 바닥과 벽 문에 거즈와 부레풀, 라텍스로 공간의 피부를 만들어 벗겨낸다. 그리고 그녀는 벗겨내는 과정도 작품의 한 과정으로 여겨 영상으로 제작했는데, 그녀는 벗겨낸 공간의 피막을 뒤집어 쓰는 행위까지 보여준다.
<비디오 영상첨부자리>
부허 개인의 역사 속에서의 억압의 공간인 남성들의 서재를 시작<바닥 피부(Floor Skins)>(1980)으로 사회적인 억압의 공간으로써의 의미를 가지는 벨뷰요양원의 빈스방거 박사의 진찰실 전체를 스키닝한다.
전시장 안 거대하고 시간이 지나 누렇게 바랜 천이 만들어 낸 공간 안으로 들어가면 사방이 막힌 것 만으로도 답답한 느낌이 드는데, 이 공간은 다름아닌 여성에 한정된 질환으로 여겨지던 히스테리아(hysteria)의 전문의였던 빈스방거 박사의 진찰실의 벽을 스키닝(Skinning공간에 라텍스를 바르고 천으로 덮은 후 벗겨내는 기법)을 한 것이다. 빈스방거박사는 프로이트와 함께 여성 한정 질환으로 여겨졌던 히스테리아의 대표적인 연구자였다고 한다. 히스테리아는 그리스어인 자궁에 그 어원을 둔다. 즉, 자궁의 질병으로 생각했던 히스테리아는 지금으로 말하면 사회적으로 공인된 가스라이팅 행위가 아니었을까. 계속해서 나오는 억압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찾아보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억압이라는 단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정의된 단어이기도 했다.
네이버 한국어사전에는 억압이라는 단어를 세가지로 분류하고 있었다.
• 1.명사 자기의 뜻대로 자유로이 행동하지 못하도록 억지로 억누름.
• 2.명사 생명 제2의 돌연변이가 최초의 돌연변이 유전자의 발현을 억눌러 본디 형질이 발현되는 현상
• 3.명사 심리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어떤 과정이나 행동, 특히 충동이나 욕망을 억누름.
그런데, 네이버검색창에 억압을 검색하면 대부분은 심리학, 특히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서의 무의식으로 가둬두는 억압의 의미가 검색된다.
억압repression, 抑壓
고통스럽고 불쾌한 생각이나 기억을 의식에서 축출하여 무의식에 가두어 두는 과정
수많은 세월을 여성들은 그 당연하게 여겨지던 자본주의의 가부장적인 위계질서 안에서 입 속의 혀처럼 부드럽게 굴며 조신하게 행동해주기를 바라는 남성들의 아름다운 소유물로 취급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유리천장의 예나 미술경매시장의 자료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에도 이런 불평등함이 상당한 정도로 여전하다는 것이 당황스럽지만, 여기서 필자는 이 상황을 조금 비껴서 생각해보고 싶다.
권력은 보통 타자에 대한 억압과 폭력적인 형태로 여겨지지만, 한병철은 <권력이란 무엇인가>에서
“긍정적 형태로서의 권력은 형성하고 산출해내며 질서를 부여한다. 권력은 폭력과는 반대로 생산적이다. 권력은 혼란이 생겨나는 것을 막는다_서문6page”고 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하나의 목소리에 절대적 타당성이 부여되지 않는 시대이다. 다수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에 묶여지거나 매개되거나 중재되는 힘. 수많은 목소리들이 커뮤니케이션이 되는 중심요소로써의 힘으로써의 권위 있는(사회적으로 승인된)힘이 없다면 목소리들은 불협화음이나 웅성거림의 소음이 될 뿐이다. 물론 아직까지 권력에 대한 개념은 이론적인 혼란에 빠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힘을 중심으로 질서가 만들어져야 의미 있는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건 짐작해 볼 수 있다.
가부장적인 사회구조가 문제인가. 가부장적인 사회의 부정적인 힘의 행사가 문제인가. 그 부분을 생각해보고 싶었다. 울타리를 만들어주고 가족들을 안전하게 만드는 힘. 가부장제도도 그런 안전과 번영에의 욕망. 그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떤 형태든 다른 힘이 생긴다면 그 힘은 가부장제의 억압과 폭력으로부터 대치하며 또 다른 이들을 억압하는 힘이 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물리적 존재로써 우리는 중력을 벗어나 살 수 없는 것처럼 힘의 법칙을 벗어나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부허는 물처럼 움직이고 흐르며 변화하는 힘에 대해 자각했다. 끔찍한 것들을 벗어내고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갔다가 탈피한다. 단단하고 견고한 질서들을 털어내고 정화하고 치유하며 해방되고자 했다. 그리고 힘들은 물처럼 또 다시 흐르고 모여 다시 자유롭게 입고 벗을 수 있는 부드러운 조각을 확장하여 만들었다.
괴테는<파우스트>의 마지막을 이런 문장으로 마무리하는데,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간다.” _파우스트
여성적인 힘이란 어떤 걸까. 필자는 아직 여전히 의문을 가지고 있지만, 기존의 남성적인 힘으로 대변되는 로고스적 질서를 적대시하고 파괴하며 새로 세워나가야 할 새로운 힘이 아니라 그런 힘 조차 포용하며 길러내며 화음의 질서, 균형의 질서를 유연하게 만들어가는 성숙한 형태의 힘들을 계속해서 발견해내 보고 싶다.
사족
하이디 부허는 왜 나비가 아니고 잠자리로 탈피하고 싶었을까.
하이디 부허의 대표작 중 하나는 잠자리의 욕망이다.
잠자리는 도시에서 쉽게 보이고 약해 보이는 곤충이지만, 잠자리는 모든 곤충들 중에서는 먹이 사슬의 정점에 위치한 상위 포식자라고 한다. 인간에게 불편함을 주는 모기를 잡아먹고 살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인간에게는 도움이 되는 익충이기도 하다. 물론 하이디 부허는 가느다랗고 약해 보이지만 번데기에서 불완전 변태하여 탈피하면 보일 듯 말 듯 접히지도 않는 얇은 막의 날개를 가지고 가볍게 날아가는 해방의 순간을 상상했을지 모르겠다.
더 보기 자료
https://www.artsy.net/article/artsy-editorial-state-market-women-artists-work
https://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324
https://monthlyart.com/portfolio-item/heidibucher2023/
한병철, 권력이란 무엇인가, 초판 2011년,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