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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Nov 22. 2024

당신은 괜찮으신가요?

«올해의 작가상 2024», 인간관계를 탐구하는 윤지영의 조각적 표현

국립현대미술관은 현재 «올해의 작가상 2024»를 전시하고 있다. 올해 선정된 작가는 권하윤, 양정욱, 윤지영, 그리고 제인 진 카이젠이다. 전시의 도입을 장식하는 윤지영의 작업은 감춰진 내면을 밖으로 드러내고, 사회 속에서 발생하는 나와 타자의 관계를 탐구한다.


https://artlecture.com/article/3335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몰라 내장을 꺼내 그물을 짓던 때가 있었다.>(2024)



국립현대미술관의 주최로 매년 4인의 작가를 소개하는 «올해의 작가상» 전시는 2023년부터 신작뿐 아니라 전작을 포함해 작가의 작업 세계를 총망라하고 있다. «올해의 작가상 2024» 전시실에 처음 들어섰을 때 마주하는 것은 윤지영의 그물 조각이다. 천장에서 바닥으로 늘어진 거대한 그물 형태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내장을 꺼내 그물을 짓던 때가 있었다.>(2024)라는 제목이 붙었다. 작가의 일기장에서 꺼낸 듯 솔직하고 꾸밈없는 이 문장은 조각에서 시각적으로 가시화된다. 신체의 내피를 연상시키는 끈적한 질감의 조각은 손으로 짜인 투박한 그물처럼 보이며, 관객의 움직임이 일으키는 바람에 천천히 흔들려 연약하고 불안한 정서를 전달한다. 윤지영의 조각은 개인이 느끼는 고통이라는 내밀한 감각을 외부로 꺼내 관객의 눈앞에 놓는다. 타인의 고통을 마주한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미, 노〉(2021)



다음 전시실로 이동하면 마주하는 〈미, 노〉(2021)는 부피가 약 65,416cm³로 동일한 검은색 다면체 조각 여섯 개로 구성되어 있다. 하트 기둥, 별 기둥, 구, 원기둥, 육면체, 삼각뿔로 다양한 형태의 조각은 모두 실리콘 천으로 싸여 있다. 사실 싸개는 각각의 도형에게 맞는 것이며, 실리콘 천은 맞지 않는 도형에 싸여 군데군데 찢어지거나 헐겁게 걸쳐 있다. 별 기둥은 구의 싸개를, 구는 삼각뿔의 싸개를 입고 있는 식이다. 서로의 외피를 바꿔 입었다는 의미에서 실리콘 천은 인간의 피부, 검은 도형은 인간의 내면, 혹은 인간의 몸에 대응된다. 피부의 불일치와 찢어진 상처는 속절없이 내면을 노출당해 취약해진 상태를 떠올리게 한다. <미, 노>는 신체와 피부의 물리적인 관계를 넘어 “되고 싶은 모습, 될 수 없는 모습, 되어야 하는 모습 사이에 겪는 괴리감”을 나타낸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는 젠더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설명하며, 특히 ‘모호성(ambivalence)’ 개념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모호성이란 상실된 대상에 대한 애착과, 이에 부응하지 못한 공격성이 내부로 향하며 자아가 파편화되어 만들어진다. 이러한 애착과 실제의 불일치는 젠더정체성과 연관되는데, 불안정하고 비결정적인 젠더의 모호성은 사회적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다. 버틀러는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Bodies That Matter』의 서론을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 1944-)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왜 우리의 몸은 피부에서 끝나거나, 기껏해야 피부로 둘러싸인 다른 존재를 포함해야 하는가?” 이처럼 피부는 신체의 내부와 외부라는 물리적인 경계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 사회적인 경계가 되기도 한다.


윤지영의 작업은 물리적인 신체의 피부를 표현하는 동시에 사회 속에서 고립된 개인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사회 속에서 다양한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타인을 통해 자신의 결핍을 목격한다. “되고 싶은 모습, 될 수 없는 모습, 되어야 하는 모습”이라는 욕망이 좌절되며 우리는 이상적 모습을 실현하지 못한 나약한 자신으로 공격의 화살을 돌린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취약해진다.



<달을보듯이보기>(2013)



그러나 윤지영이 사회 속의 다양한 관계를 부정적으로만 그리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업에서 상처받은 아픈 존재들은 자주 서로 의지하고 연대한다. 영상작업 <달을보듯이보기>(2013)는 작가가 높은 천장에 머리카락을 묶은 상태로 철봉에 매달리는 아찔한 장면을 그린다. 머리 가죽이 뜯길 위험에 처한 일촉즉발의 순간, 개인으로서 작가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눈앞에 놓인 가느다란 철봉뿐이다. 점점 힘이 빠지며 한계에 달하는 순간 구원자가 등장한다. 양쪽 사다리에 선 두 사람이 머리카락을 가위로 잘라 그를 위기에서 구출하는 것이다. 작가는 큰 소리를 내며 바닥의 거북이 등딱지 위로 안착하고, 깨진 등딱지의 균열을 비추며 영상은 끝난다. <달을보듯이보기>에서 작가는 생명을 타인에게 맡기고 위험한 상황에 자신을 내던진다. 사다리에 올라선 두 사람의 가위질로 한번 목숨을 건진 작가는 바닥으로 추락한 후, 거북이 등딱지라는 완충장치를 통해 다시 한번 안전을 확보한다. 거북이 등딱지가 피부, 즉 손톱과 같은 단백질 각질층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앞서 살핀 다른 피부 조각들과의 연결점을 떠올릴 수 있다. 영상에서 피부(거북이 등껍질)는 부서지지만, 이는 개인의 상처와 고통을 은유하지 않는다. 균열은 타인을 생명에서 구원하는 ‘희생’이라는 숭고한 차원에서 발생하며, 잘린 머리카락은 희생에 대한 감사의 봉헌으로 바쳐진다.


<간신히 너, 하나, 얼굴>(2024)


전시실의 첫 번째 방에 배치되었던 <간신히 너, 하나, 얼굴>(2024)은 윤지영과 그 친구들의 관계를 표현한 작업이다. 마치 반사되는 물속에 잠겨 머리만 떠오른 듯 보이기도 하는 이 조각의 주인공은 오른쪽 귀가 떨어져 나왔으나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다. 작업의 배경 이야기는 마지막 전시 공간의 영상작업 <호로피다오>(2024)에 소개된다. 윤지영은 영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네 명의 친구에게 자신의 안녕을 위하는 마음, 서로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 자유롭게 표현해달라고 요청했다. 작가는 친구들의 음성을 밀랍(비즈왁스) 실린더에 기록한 후, 이를 녹여 자신의 얼굴로 주조했다. 실린더에 기록된 마음은 다시 디지털로 녹음되어 <간신히 너, 하나, 얼굴>의 우물-제단 조각에서 흘러나온다. 윤지영은 신체의 일부를 밀랍으로 떠낸 ‘봉헌물(ex-voto)’을 차용해 작업에 담았는데, 이는 형태가 쉽게 변하는 밀랍의 가소성을 이용해 아픈 신체 부위의 치유를 기원하는 것이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언어라는 사회적 경계를 넘어, 밀랍 봉헌물이라는 매개를 통해 공명한다.


이처럼 윤지영의 조각은 언뜻 내장을 노출하고 피부에 상흔을 남기는 그로테스크한 표현을 사용하지만 각각의 작업은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채 인간관계에 대한 폭넓은 관점을 제공한다. 현대인의 고립과 좌절, 타인을 걱정하고 고마움을 전하는 따뜻한 마음은 작가의 개인적인 감정과 경험에서 나아가 관객의 공감을 자아낸다. ‘나’의 고통은 나만의 것이 아닌, 모두가 한 번쯤 겪는 공통된 감각이다. 작가가 친구들의 안녕을 바라던 우려 섞인 마음이 이제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괜찮으신가요? 부디 괜찮기를 기원합니다.


                    

참고자료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4» 홈페이지: https://koreaartistprize.org/project/%ec%9c%a4%ec%a7%80%ec%98%81/


Butler, Judith. Bodies That Matter : On the Discursive Limits of “Sex”. New York: Routledge, 1993.




글 아트렉처 에디터_청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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