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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KER Sep 05. 2015

'파도에 씻겨져 버린 인류애'

시리아 난민 아기의 죽음

  엊그제(9월 2일)로 기억한다. 한 아이가 해변가에 바다를 향해서 엎드려 있는 사진 말이다.

단번에 보더라도 그 아이의 쓸쓸하고 참혹한 죽음임을 알 수 있었던 외신 기사에 실려 있었다.


  "로이터는 터키 매체를 인용해 사진의 아이가 시리아 코바니에서 온 3세 소년 에이란 쿠르디라고 밝혔다. 이 아이를 포함한 시리아 난민들은 터키 보드룸에서 그리스섬 코스로 가던 중이었다."
시리아 다마스쿠스 출신인 쿠르디의 가족들은 내전이 심해지자 이웃 터키로 넘어와 유럽이나 캐나다 이주를 시도했다.

전에도 두 차례에 걸쳐 브로커에서 돈을 주고 에게해를 건너 그리스 코스 섬까지 가려고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고 이번이 세 번째 밀입국 시도였다고 AFP통신은 전했다.
세 번째 유럽행을 시도한 날 쿠르디 가족은 다른 난민들 여러 명과 함께 작은 배에 올랐다.
12명이 꽉 들어찬 소형 고무보트는 한눈에도 위태로워보였으나 걱정하는 쿠르디에게 브로커는 "괜찮다. 안전하다"고 거듭 장담했다고 미국 CNN방송은 보도했다.
그러나 터키 해안을 출발하자마자 거친 파도에 이들을 태운 보트는 위태롭게 흔들렸고 함께 배에 올랐던 브로커는 곧바로 배에서 뛰어내려 해안까지 헤엄쳐갔다.

쿠르디는 배의 중심을 잡으려고 애썼으나 배는 곧 뒤집혔다.
"배에 매달리려고 했지만 바람이 빠지고 있었어요. 아내의 손은 잡았으나 아이들은 내 손에서 빠져나갔습니다. 너무 어두웠고 모두 비명을 지르고 있었죠."
어느새 아내의 손도 놓친 그는 가족들을 찾아 물에서 20분 가량 머물다 불빛에 의지해 터키 해안까지 헤엄쳤다.

해안에도 아내와 아이들은 없었고, 혹시나 하고 보드룸 시내에 이들이 주로 만나던 장소에 갔지만 가족은 없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병원에 갔다가 비보를 듣게 됐다.


  기사에서 접한 아버지의 간략한 인터뷰를 눈으로 읽으며 어둡고 검푸른 바다를 떠올렸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눈 앞에서 잃어야만 했던 아버지의 심정을 정말 나는 이해하고 있는가? 의문도 들었다.


에이란 쿠르디(왼쪽)와 형 갤립(5세)-언론은 형 또한 죽은 것으로 보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시리아 내전 사태로 심심찮게 신문의 국제면과 저녁 뉴스에서 유럽 각지로 향하는 난민들의 기사를 접한다.

사실 그 동안 이와 같은 난민들에 대한 사건과 사고 소식은 익숙해져 버렸다. 쿠르디 가족과 같은 비극은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무감했을까? 단순히 사진 한장에 이토록 무신경했던 뉴스에 왜 이제서야 참을 수 없는 먹먹함을 느낄까?

후속 기사들을 찾아 읽고, 또 읽고.

충격이였다. 어떤 잘못도 없는 아이가 '시리아'라는 곳에서 태어나 위태로운 생활을 접고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사람답게 살기 위해 떠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배에 올랐을 에이란과 형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에이란의 마지막 모습을 사진과 기사로 본 많은 사람들은 SNS를 통해 전세계로 퍼지고 있다. 답도 없고, 풀이도 보이지 않는 난민 문제를, 익숙해져 버린 죽음을, 에이란을 통해 사람들은 다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동안 난민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였던 영국은 앞으로 난민들을 더 많이 수용할 것으로 보이고, 독일과 프랑스 또한 난민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총리와 대통령의 성명이 나왔다.


'왜 항상 우리는 되돌릴 수 없는 가치와 생명을 잃은 뒤에야 다시 찾을까'


  누군가는 난민문제를 외교, 재정적 문제를 더 우선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섣부른 동정심으로 인해 자국민과 자국의 경제에 심각한 위험이 있을 것이라고...

이것이 진정 동정심이나 단순한 감정의 문제일까? 정말 사람의 목숨과 돈을 저울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답답하던 중에 뉴스 블로그에서 어쩌면 해결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글을 읽었다.

법적으로 난민(refugees)과 이주민(migrants)은 구분해야 합니다. 이 둘을 구분하는 기준은 '절박함', 그리고 '선택의 여지가 있었는지' 여부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난민은 여권과 비자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 인류 보편의 국제법 영역이고, 이주민은 여권과 비자를 챙겨야 하는 국내법의 문제입니다.
지금 시리아를 떠나 유럽으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이 기준을 대입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절박할 뿐더러,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이주를 선택한 집단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국경에서 그들을 상대로 여권과 비자 검사를 하겠다고 하기가 어색해 보입니다.
답은 나온 것 같습니다. 이제 UN은 시리아 난민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할지, 판무관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지 세밀하고 구체적인 방침을 정해서 공표해야 합니다. 유럽 각국의 지도자들은 과거 러시아 혁명 때, 나치가 유럽을 휩쓸던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상기해야 합니다. 지역과 종교, 역사에 얽매이기보다 그보다 더 크고 위대한 인권의 바다를 바라봐야 합니다.

함석천 판사의 글 중에서...


  UN난민기구 홈페이지를 찾아봤다. '시리아 난민 긴급구호' 캠페인 중이라는 배너가 눈에 들어온다.

학생 신분에 이미 후원하고 있는 단체도 있고, 많지는 않지만 후원하기에 동참한다. 한 끼 굶는 셈 치고 말이다.




  굳이 매거진까지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이벤트에나 동참할까해서 이렇게 하나 만들었다.

'i see u'라는 제목은 영화 <아바타>에서 나오는 대사에서 가져왔고, 의미-현상과 물질을 넘어선 생명(영혼)의 가치-또한 비슷하다.

존중 받지 못하는 인권인간의 편의를 위해 무시되는 동물, 그리고 무분별한 개발과 자본에 무너지는 자연 환경에 대해 내가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들을 턱 없이 부족한 몇 줄의 글로 기록해 보려고 한다.

**)위의 주제와 부합한 글과 작가님이라면 언제나 매거진 참여의 문은 열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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