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세는 여돕여 아닌가요
작가 『김랄라』
올해 가장 과몰입해서 본 드라마 하나를 꼽자면 단연 ‘부부의 세계(연출 모완일, 극본 주현)’가 아닐까 싶다. 김희애의 작품 보는 눈을 믿고 보기 시작한 부부의 세계는 첫 화부터 숨 막히는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며 나를 단번에 빠져들게 했고 이내 가장 ‘핫’하다는 금요일과 토요일 밤에 약속을 잡지 못하게 하는 사태를 만들어버렸다(실제로 드라마 때문에 놀지 않겠다고 하자 주변에서 많은 욕을 먹었다.) 이 드라마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장면은 지선우(배우 김희애)와 민현서(배우 심은우)의 밀회 장면이다. 남자 친구에게 데이트 폭력을 당하고 있던 현서는 선우에게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으러 갔다가 제안을 하나 받게 된다. 남편과의 합리적인(?) 이혼을 위해 외도 증거가 필요했던 선우를 도와 그의 남편을 감시해달라는 것. 그 뒤로 선우와 현서는 서로의 조력자가 된다. 그 둘이 서로의 목적을 위해 작당모의를 하는 장면은 묘한 쾌감을 느끼게 했다. 이제껏 한국 드라마에서 볼 수 없었던 여돕여(여자는 여자가 돕는다) 구조가 주는 짜릿함이었다.
없는 것은 부모와 집이요. 있는 것은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 친구가 전부인 현서와 나의 공통점은 사회에서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는 초년생의 막막함일 것이다. 물론 인생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현서의 경우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유일하게 하나 있는 공통점 때문에 현서에게 더욱 애착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선우는 단순한 조력자를 넘어 험난한 사회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 선우와 현서를 보고 있자니 문득 내가 여태껏 무너지지 않고 잘 버틸 수 있게 도움을 주었던 언니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나에게 선우이자 사회 선배이자 인생의 조력자였다.
나의 첫 번째 조력자는 아르바이를 했던 초밥집 매니저님이다. 대학교를 다니는 내내 나는 아르바이트를 쉰 적이 없었다. 덕분에 피자 가게, 뷔페, 마트, 편의점 등등 종류만 해도 일곱 가지나 됐다. 가장 길게 일했던 곳은 동네 캐주얼 초밥집이었는데, 1년 반 동안 일하며 매니저 제의까지 받은 적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 오래 일 할 수 있던 이유는 매니저님의 영향이 컸다. 당시 나는 사장님이 차로 집까지 바래다주신다고 하면 냉큼 조수석이 아닌 뒷좌석에 앉을 정도로 사회 매너에 무지했다. 센스가 있고 일을 잘하는 것과 별개로 사회에 만연해 있는 암묵적인 매너를 스물두 살의 나는 당연히 알지 못했고, 득을 취하고 해를 보지 않으면서 유연하게 사람을 다루는 일에 서툴렀다. 오로지 열심히만 하면 된다는 마음이었다. ‘열심히 하면 알아봐 주겠지’라고 생각하며 정말 열심히 일만 했던 것 같다. 그런 순진한 생각을 깨뜨려 준 것이 바로 매니저님이다. (그렇다고 열심히 하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내 몫을 챙기지 않고 열심히만 한다면 그 노력을 갈취하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는 자기 몫을 안 챙기고 열심히만 일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아니면 본인의 뒤를 이어 나를 매니저 자리에 앉히려는 의도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나에게 각별한 관심을 주셨다. 특히 오랜 사회생활에서 터득한 요령을 알려주셨다. 몇 가지 적어보자면 깔끔하게 일하고 재수 없지 않게 생색내는 법, 전문적이게 보이면서도 부담스럽지 않게 사람 응대하는 법,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리는 법이다. 당시에는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훗날 사회생활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때쯤 알게 된 사실은 그가 초밥집 매니저를 하기 전에 회사 생활을 몇 년간 했었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직장생활을 하게 될 나를 보며 본인의 초년생 시절이 떠올랐던 것일까. 그로부터 2년 뒤 회사원이 된 나는 그에게서 배운 것들을 곱씹으며 완벽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순진하지 않게 직장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다. 그의 진심 어린 조언과 따뜻한 응원이 없었더라면 나는 여기저기 치이며 더욱 험난한 사회생활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두 번째 조력자는 사회에서 만나 함께 책까지 만든 한 살 많은 언니이자 인생의 동료 C이다. 어떤 사람의 인생을 옆에서 지켜보며 닮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 있다. 그는 그 몇 명 중 한 사람이다. 주체적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언니에게서 나는 늘 힘을 얻는다. 나와 C의 가장 큰 공통점은 책임감 강한 K-장녀라는 것. 둘째와 달리 인생의 레퍼런스가 없는 첫째의 외로움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언제나 나에게 실용적인 도움을 준다. 일자리 제의, 퇴직금 정산하는 법, 실업급여 신청하는 법, 적금 추천 등등... C는 늘 나의 성공을 응원한다. 작년, 비슷한 직종에 비슷한 시기에 취직하면서 나와 C의 의리는 더욱 끈끈해졌다. “절대 지지 말자.” “함께 재미있게 살아보자꾸나.” “다재다능한 랄라는 반드시 성공할 거야.” 언니의 진심 어린 응원은 나의 자존감을 높인다. 그의 존재는 내게 가시밭길로 둘러싸인 사회에 맞설 용기가 된다.
의심과 차별이 난무하는 세상, 나는 언니들에게서 오늘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불완전하고 답도 없는 사회에서 연대라는 따뜻함을 느끼게 해 준 그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앞으로 만날 언니들과 여동생들에게 내가 느꼈던 용기를 나눠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