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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너와 하는 모든 처음이 기대된다

여섯 살이 된 너와 서른아홉 살이 된 내가 그려갈 2021년이!

"아빠랑 엄마랑 같이 있었다는 거!!"


아들의 대답에 그새 내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앞에 앉은 남편이 나를 놀린다. "OO아~ 엄마가 감동받았나 봐. 찔찔쟁이 엄마 또 운다, 엄마 왜 울렸어~ 하하하!” 2021년 1월 1일, 새해를 맞은 우리 세 식구는 오붓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식사를 할 때 TV의 도움 없이 아빠/엄마와 대화를 하는 법을 연습해왔던 녀석은 여섯 살 형님 티가 좀 더 날만큼 그새 대화가 핑퐁처럼 잘도 이어진다.


그 순간 나는 아들에게 물어보았다. "OO아, 어제까지가 작년이거든? 오늘로 OO이가 여섯 살 형님이 되었는데 말이지~ OO이의 다섯 살 기억 중에서 가장 감사했던 건 뭐야?"라는 나의 질문에 녀석은 0.1초도 안 되어서 대답을 한 거였다. "아빠 엄마와 같이 있었다는 거!" 남편은 말했다. "이거야말로 우문현답이네!"


또르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다시 물어봤다. "그러면, 다섯 살 기억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거는?" 나의 질문에 아들은 또다시 숨도 안 쉬고 대답했다. "응! 선물 받은 거! 산타 할아버지도 선물을 주셨고, 할머니가 소라게도 사 주셨잖아. 그게 제일 행복했어!" 두 번째 질문의 답에서 '아들 녀석이 아직 꼬마는 꼬마로구나' 싶었다.


나의 첫 번째 질문에 아빠 엄마와 함께 있는 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녀석에게 너무 고마웠다. 맞벌이인 우리 부부가 아들과 온전히 함께 해 주는 시간은 객관적으로는 현저하게 부족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아들과 함께 있는 그 시간만큼은 양보다 질로 승부하기 위해 온 열정을 다했다.


하루에 10시간씩 어린이집에 맡겨지는 것에 대해 투정 부리지 않고 가끔은 꼴찌로 하원하는 날들에도 미안해하는 엄마에게 "괜찮다"며 위로를 건넬 줄 아는 녀석에게 나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퍼부어주었다. 아들이 그런 내 마음을, 남편의 마음을 알아준 것 같다는 사실과 아들이 우리를 생각해 주는 고마움에 밥을 먹다 말고 한동안 눈물을 훔쳤던 새해 첫날이었다.




함께 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너무나 여실히 깨닫는 며칠이었다. 2020년 12월 31일, 은행 마감시간에 직원들과 나름의 송구영신 시간을 보내며 정신없이 웃고 떠드느라 엄마에게 온 연락도 퇴근하기 직전에 확인하게 됐다. 엄마의 메시지를 확인하던 그 순간 너무 놀라서 핸드폰을 책상에 떨구고 그 문자를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오늘 오전에 갑자기 OO삼촌이 소천해서
엄마 아빠 OO병원으로 가고 있어..."

'둘째 외삼촌이 갑자기 소천했다고? 아직 50대 후반밖에 되지 않는 삼촌이? 왜? 어쩌다가?' 수많은 궁금증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모든 걸 제쳐두고 너무 슬퍼서 글씨도 써지지 않는다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인은 심장마비라고 하면서 시신에 대한 코로나 사후검사가 밤늦게 나오는데 그전까지는 빈소도 차릴 수 없다며 애통해하는 엄마의 목소리는 이미 너무나 큰 절망과 슬픔에 젖어 있었다.


육 남매의 가장 맏이인 엄마는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 3년 전, 외할머니가 소천하신 후에는 형제들끼리 모이는 것도 많이 소원해졌다. 엄마는 이렇게 허망하게 가장 먼저 떠날 줄 몰랐기에 살아 있을 때 싱글인 남동생에게 더 많이 잘해 주지 못한 것에 상당한 죄책감을 가졌다. 다들 자기 가족 챙기기 바쁘니깐 엄마 잘못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세 번째 동생이자 형제들 가운데 가장 먼저 소천한 둘째 외삼촌에게 벌어진 지금의 일을 엄마는 한동안 믿기 힘드리라.


나 또한 둘째 외삼촌을 실물로 봤던 것이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세 달 전에 내가 코로나 확진자로 병원에서 격리되어 치료받을 때 삼촌에게 전화가 걸려와 통화했던 것이 그와의 마지막이다. 내게 전화한 삼촌은 하나님이 꼭 치료해 주실 테니깐 걱정하지 말고 기도 열심히 하라고 했다. 나를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으니 용기 내라고 해줬던 삼촌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오늘 둘째 외삼촌은 한 줌의 재가 되어 하늘로 훨훨 올라갔다. 근심도 걱정도 슬픔도 없는 그곳에서 평안한 안식을 취하게 된 우리 삼촌의 명복을 빌어본다. 그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으면서도 나 또한 나 살기 바빠 다른 식구들의 형편까지 돌아보지 못함을 후회하며, 앞으로 매해 연말마다 삼촌을 기리면서 나와 함께 이 시간에 살아내고 있는 가족들에게 고마움과 사랑을 전하겠노라 다짐을 해 본다.




눈물을 훔치던 내게 아들이 물었었다. "그러면 엄마는? 엄마는 나 다섯 살 때 뭐가 제일 감사했는데?" 그 질문에 나 또한 바로 답했다. "응! 엄마는 내가 코로나를 무찌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우리 세 식구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거! 그게 제일 감사해~" 그렇다. 내가 코로나라는 무서운 전염병에 걸렸었지만 현재 내 자리를 다시 찾고 사랑하는 나의 남자들과 살을 부대끼고 있으니 이보다 감사한 것이 또 있을까.


그래서일까, 한 살을 더 먹는 것도 벌써 내 나이가 서른아홉이 되어 내년이면 불혹이 된다는 사실도 하나도 슬프지가 않다. 오히려 여섯 살을 맞은 나의 아들과 함께 하루하루 그려나갈 2021년의 미래의 매일이 너무 기대될 뿐이다.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보다 우리 아들이 벌써 여섯 살 형님이 되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고, 그새 훌륭하게 훌쩍 자라 어느덧 나에게 매일같이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러주는 이 녀석과 어떤 아름다운 추억들을 쌓을 수 있을까 고민할 뿐이다.


하루 종일 집에서만 있어도 아빠 엄마와 함께만 있다면 자기는 즐겁고 좋다고 말해주는 녀석과 벌써 48시간 지긋하게 붙어 있었다. 바깥에 나가서 콧바람을 쐬자고 꼬드겨봐도 집에 이렇게 장난감이 많고 신나는데 왜 바깥에 나가냐고 되묻는 아들 덕분에 오늘도 내 입가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자기 옆에 엄마만 있으면 된다고, 그러면서 자고 일어나면 내일 어린이집에 가야 하냐고 물어보는 아들의 질문에 괜스레 또 찡했던 밤이다.


올해는 꼴찌 하원을 절대 하지 않도록 더 분발해 보겠다고 다짐하면서 코로나 상황이 지금보다 개선되지 않는 답답한 안개 같은 날들이 계속되어도 너에게만은 넘치는 사랑을 퍼부으며 내가 살아있음에 감사하겠노라 다짐해 보는 새해 둘째 날이다. 오늘 이후에 그려질 너와의 모든 처음이 너무나 기대되는 밤이다.


모두 해피 뉴 이어!!!! 우리 모두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감사가 그 어떤 해 보다 넘치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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