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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정 Dec 29. 2021

회화적인 색감이 가득한

사울 레이터 사진전

1959 Paris
회색 뉴욕의 녹색 신호등 1950



영화 [캐롤]의 무드와 시대적 모티브가 되었던 포토그라피, 사울 레이터의 사진전을 관람했다.

회화적인 색감과 흐릿하고 중심에 놓이지 않은 피사체, 틀을 벗어난 구도, 안개나 유리창처럼 무언가를 통해 보이는 사색적인 느낌은 아날로그적 감정을 샘솟게 하며 흡사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사울 레이터는 1940년 컬러 필름이 나오기 시작한 시점부터 흑백과 컬러를 넘나드는 작품을 완성함으로 윌리엄 이글스턴, 스테판 쇼어 등 컬러 사진의 시대를 연 1970년대 작가들보다 훨씬 앞섰는데, 당시 새로운 기술이었던 컬러 사진은 색상 재현에 한계가 많아 동시대 평론가들에게 '진실을 왜곡한다'라는 폄하를 들었다고 한다.


사울 레이터가 1940년대부터 찍은 컬러 사진이 대중에게 공개되며 재평가가 이루어진 것은 그의 나이 80세를 훌쩍 넘은 2000년 중반의 일이었다고 하니, 20대에 뉴욕에 정착한 이후 60여 년의 세월 동안 얼마나 외로운 작업을 이어갔을지 짐작이 되면서 한 인간으로서도 대단한 인내심을 지닌 사람이었구나 생각이 든다.





레이터의 작품으로 1950-1970년 20세기 중반, 문화의 황금기를 지나는 뉴욕을 만나볼 수 있는데 북적이는 도시와 바쁜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이 주로 담겨 있다. '새로운 일들은 익숙한 장소에서 일어난다'라는 레이터의 메시지처럼, 지구 반대편이 아닌 익숙한 장소를 새롭게 보려는 시선과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작품들이다. 본질과 다르게 표현된 컬러나, 완전하지 않은 형체, 여러 개의 피사체들이 동시에 담긴 프레임, 틈새를 통해 보는 전체의 일부분들이 새롭고 아름답다.



1950년대 초창기 흑백 사진
1950년대의 뉴욕 거리
어린아이와 노인의 뒷모습을 겹쳐 한 프레임에 담은 사진
1951년 라이프 잡지에 실린 사울 레이터의 <구두닦이의 신발>



<구두닦이의 신발>이란 작품은 보편적이고 일반화된 시선을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그만의 세계관이 잘 나타나 있다. 상식적인 사람의 시선이 손님의 반짝이는 구두에 주목할 때, 레이터는 반대편 구두닦이의 해지고 닳은 구두를 포착함으로써 일상의 풍경을 교묘하게 반전시킨다. (더군다나 1951년의 종이 잡지라니!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1951년이라니!)



자화상



레이터는 사진을 오리고 연결하는 패치워크의 작업을 즐겼다고 한다. 후반기에 들어서는 흑백 사진 위에 물감을 덧입히는 작업도 하였는데 포토그라피를 넘어서는 다양한 분야에서 예술가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1940, 50년대에 촬영되었으나 세상에 공개한 적 없었던 레이터의 추억. 사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흑백 사진 위에 물감으로 덧칠한 '페인티드 누드' 시리즈는 1970년대 헨리 울프와 누드집 출간을 구상하였다가 1981년 스튜디오를 폐쇄하면서 차질이 생긴 이후 20여 년의 긴 시간 동안 틈틈이 덧칠한 작품으로 그의 사후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여러 책 사이에 무심히 끼워진 채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좀 더 일찍 인정받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작품들이다.



1980년 스튜디오를 떠나며



아마도 1980년 스튜디오를 폐쇄할 때 자신의 모습을 남긴 사진이 아닌가 한다. 보는 내가 더 씁쓸하여 한동안 쳐다보았던 사진. 아티스트에겐 예나 지금이나 혹독하기는 마찬가지겠으나, 대중을 만나는 일이 지금보다는 더 어려웠을 레이터의 시대에 주목받지 못한 아티스트는 얼마나 더 외로웠을까 싶다. 더군다나 어떠한 예술 운동이나 사조에도 동조하지 않고 스스로의 세계에서 조용한 삶을 살았던 레이터는 더욱 그랬을 테니까. 성공의 기회를 포착하지 않았던 예술가라니. 사진을 정말 좋아했구나 싶고, 사진에 대한 그의 한결같이 순수한 열정이 느껴졌다. 나는 무엇에, 혹은 누군가에게 그렇게 뜨거웠던 적이 있었나? 잠시 돌아보게 되었다.





1958년의 바자를 보고 있노라니 지금과 견주어도 손색없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란 참으로 대단하여 그 어떤 미미한 시작이라도 시간의 흐름을 견디고 버티다 보면 역사가 된다. 단순한 매거진이 아닌 아름다움의 역사. 오랜 시간이 쌓인 아카이브는 감동적이다.


1958년 하퍼스 바자의 아트 디렉터였던 헨리 울프에 의해 패션 사진을 찍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의 패션 사진은 제품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전달하는 것에 더 큰 의의가 있어서 모호하고 무심한 레이터의 사진은 새로운 시도였다고 한다. 모델의 포즈와 표정, 옷의 주름과 빛의 방향까지 철저하게 통제하는 연출 사진과 달랐던 레이터의 사진들은 패션 사진의 틀을 넘어 예술 사진으로 평가받았다고 하니, 사울 레이터와 패션의 조합은 근사하게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던 것 같은데 많은 작품을 찍지는 않았던 듯하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사진을 찍는 순간이 행복했을 사울 레이터.

한 예술가의 재능과 열정을 느끼고 그의 카메라에 담긴 피사체를 살펴보는 즐거움, 지나간 시간 속의 공간과 풍경이 아름다웠던 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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