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연, 림 킴 그리고 빌리 아일리쉬
2019년 한 해 동안 여러 의미로 필자를 설레게 했던 ‘올해의 앨범’을 꼽아보고자 한다. 연초부터 계획했던 원고인데 선정하기가 힘들어 애를 좀 먹었다. (그만큼 좋은 앨범과 아티스트가 많았다는 뜻이다.) 선정하고 보니 모두 여성 솔로 아티스트라는 공통점이 있다. 앨범 전체의 균형과 장르적인 발전, 아티스트 개인의 가치관과 신념을 중점적으로 살피며, 필자의 귀를 호강하게 해 준 <올해의 앨범>에 아낌없는 칭찬을 퍼부어 보겠다.
첫 번째 올해의 앨범은 태연의 두 번째 정규 앨범 <Purpose>다. 미리 말하자면 필자는 Purpose 앨범을 직접 구매했고 컴백 전 한남동의 모 갤러리에서 이루어진 컴백 기념 사진전도 보고 온 바 있다. 올 초, 태연은 정규 앨범 발매 전 '사계'와 'Blue'라는 싱글 앨범을 발매했다. 이 두 곡도 올봄부터 지겹게 들은 매우 사랑스러운 곡들이다. 개인적으로 태연의 발라드보다 그루브 타기 좋고, 리듬감 있는 재즈 풍의 R&B를 사랑하는데 '사계'가 필자의 취향을 완벽하게 저격했다. 이후 태연의 정규 앨범 발매를 누구보다 손꼽아 기다렸고 올 가을, 기대에 부응하는 좋은 음악을 선물 받았다.
이 앨범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라면 단언컨대 모든 수록 곡이 빠짐없이 다 좋다는 데에 있다. 일단 Purpose의 앨범 구성이 상당히 만족스럽다. 1번 트랙 'Here I am'부터 마지막 트랙인 'Gravity'까지 이토록 자연스러운 이야기의 흐름과 완벽한 균형을 자랑하는 앨범이 또 있을까. 태연 특유의 감성과 깔끔한 고음으로 더 넓은 세계의 포문을 열고(Here I am), 안정적이면서도 태연의 무한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열린 결말 같은 마무리(Gravity)라니. 태연의 신보는 무조건 전곡을 다 재생해야 한다는 법칙이 생길 수밖에 없다.
타이틀 곡 <불티>에 대한 이야기도 안 할 수가 없다. 작고 여린 이미지와는 다르게 마음 속에 거대한 불꽃을 품고 사는 여성 보컬 태연과 아주 잘 어울리는 곡이라 생각한다. 이 곡과 관련된 개인적인 경험을 보태자면, 당시 필자는 자신감이 많이 떨어지고 회복 불가한 권태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타이밍에 <불티>를 들으며 드라이브 하는 데에 푹 빠졌고 지친 일상에서 조금이나마 의지를 되찾을 수 있었다.
앞서 말했 듯 앨범 전곡이 모두 훌륭하지만 유독 많이 들었던 곡을 꼽으라면 4번 트랙 'Love You Like Crazy'와 6번 트랙 'Better Babe'다. 태연의 파워풀한 감성과 그루브가 잘 드러나는 곡이다. 감정이 과해 질척이지 않으면서도 단숨에 곡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몰입감이 상당한 곡이다. 태연만의 어두운 감성을 사랑한다면 당장 전곡을 모두 들어보시길. 그리고 지인과 각자의 최애 곡을 비교해보시길 바란다. 분명 좋은 대화 주제가 될 것이다.
<태연의 불티 MV https://youtu.be/eP4ga_fNm-E>
두 번째 올해의 앨범은 Lim Kim의 <Generasian>이다. 림킴은 모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이름을 알리며 2011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김예림의 새로운 필명이다. 그녀는 데뷔 초 타의로 만들어진 수동적인 여성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진정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못 알아보게 달라진 림킴이 선사하는 색다른 행보는 필자를 포함한 많은 여성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림킴이라는 이름으로 첫 선을 보인 곡은 'Sal-Ki'였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선이 굵고 강한 모습으로 컴백하면서 그녀가 했던 인터뷰를 떠올렸다. "클리셰가 전혀 없는 활동과 행보를 보일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영상 참조 https://youtu.be/KdNyOn2F51s) 상당히 실험적인 곡과 낯선 콘셉트로 림킴만의 정체성을 널리 알리기 시작한 시점에서, 그녀가 선보일 새 앨범이 매우 기다려졌다.
우리는 림킴의 신보가 세대를 의미하는 Generation이 아닌 <Gener'asian'>임에 주목해야 한다. 림킴은 새 앨범 <Generasian>의 타이틀 곡 'Yellow'를 통해 오랜 시간 굳어진 동양인(asian) 여성을 향한 스테레오 타입을 격렬히 거부하고 이를 타파해야 함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앨범 전체를 오리엔탈풍의 강렬한 사운드로 만들어냈고, 뮤직 비디오를 통해 이를 이미지화하는 작업에도 매우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동양적인 매력의 안무와 미술, 의상 등이 눈에 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입체적이고 실험적인 여성 아티스트가 탄생했고 필자는 그녀의 모든 컨셉 아트와 인터뷰까지 꼼꼼히 찾아보기에 이르렀다.
아티스트의 정체성을 적극 반영한 앨범은 여러 가지 평가를 남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김예림이 오래도록 기다리고 부딪히며 단련한 자신만의 음악을 통해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아낌없는 응원과 지지를 보내고자 한다. 또한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림킴의 음악적 다양성과 이야기에 주목했으면 한다. 단조롭고 특별할 것 없는 국내 음악 시장에 다양성을 불어넣어줄 엄청난 아티스트가 드디어, 제대로, 각 잡고 활동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림킴의 Yellow MV https://youtu.be/o5S3sPpkd8w>
필자가 선정한 세 번째 올해의 앨범은 빌리 아일리시의 <WHEN WE ALL FALL ASLEEP, WHERE DO WE GO?>이다. 세계적인 사랑을 받은 앨범이기에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빌리 아일리시는 2016년, 첫 등장부터 파격 그 자체였다. 독보적인 컨셉과 분위기, 개성 있는 음색과 독보적인 창법으로 단숨에 스타 반열에 올랐다. 그런 빌리가 2019년 3월, 첫 정규앨범을 발매했고 나 포함 모두가 그녀의 앨범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특히 필자가 사랑하는 10번 트랙, 'bury a friend'는 제목부터 매우 강렬하다. '친구를 땅에 묻으라'는 제목의 곡이라니. 이런 과감하고 파격적인 소재가 빌리 아일리시의 개성을 더욱더 강하게 보여준다. 빌리는 밤의 공포, 수면 장애, 꿈 등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 앨범을 구성했다. 그리하여 앨범 제목('잠이 들면, 우린 어디로 갈까.')을 위 노래의 메인 가사로 삽입했고 그녀의 우울감과 분노로 점칠된 악몽을 고스란히 가사에 드러냈다. 노래를 듣는 모두가 마치 그녀의 악몽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빌리는 몇몇 인터뷰에서 '우울증이 나의 모든 것을 지배했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그녀는 그녀가 느낀 우울감과 자기혐오와 권태감, 허무주의와 염세주의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모두 음악으로 승화했다. 그 모든 어두운 감정들을 회피하거나 지워내지 않고 최전방에서 몸소 부딪혔다. 이를 통해 음악을 듣는 모든 이들이 그녀의 감정을 왜곡 없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나아가 꿈의 해석이나 존재의 이유에 흥미를 가질 수도 있다. 나는 이 점이 세계가 빌리 아일리시에게 열광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타이틀 곡인 2번 트랙 'bad guy'는 빌리의 악동 같은 면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커버곡을 공개한 만큼 위 앨범 중 가장 대중적인 곡이라 할 수 있다. 6번 트랙 'wish you were gay'는 감성에 취하기 좋은 잔잔한 R&B 곡으로, 차분한 멜로디와는 다른 직설적인 가사가 매력적인 곡이다. 이쯤에서 소개하는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바로 5번 트랙인 'all the good girls go to hell'이다. 특정 종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선과 악을 향한 조롱, 사회 풍자 등이 담긴 가사가 필자를 아주 흥미롭게 한다.
우울하지만 신비한 그녀만의 음악을 과연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독특한 멜로디와 색다른 음악적 구성이 그녀의 독보적인 음색과 만나 세계적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요즘 필자는 그녀의 무대를 빠짐없이 찾아보는 데에 취미를 들였다. 작은 제스처나 몸짓도 '빌리 아일리시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독창적이고 매력적인 아티스트다. 밝은 형광빛의 초록색으로 물들인 머리나 달라붙지 않는 큼직한 티셔츠에 운동화를 신고 무대를 장악하는 빌리 아일리시를 보면 '덕질'을 참을 수가 없다.
<Billie Eilish의 Bury a friend MV https://youtu.be/HUHC9tYz8ik>
2019년은 특히 여성 아티스트들이 뚜렷한 활약을 보인 한 해가 아닐까 생각한다. 국내 여성 아이돌들의 진취적이고 당당한 매력이 엿보이는 컨셉들이 많아져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한 해를 대표하는 문화 예술인들을 돌이켜 보니 확실히 세상은 (조금 더디지만) 분명 변화하고 있다. 2020년에도 필자와 전 세계를 사로잡을 음악의 장르적 발전을 기대하며 긍정적인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아티스트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