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코 GR3 사용기
카메라를 샀다. 작고 가벼워 편리한데 심지어 예쁜 카메라를 샀다. 풀프레임 미러리스 카메라, DSLR 카메라, 필름카메라에 이어 즉석카메라(폴라로이드 카메라)까지 웬만한 종류의 카메라는 다 가지고 있지만 또 샀다. 살 이유를 꿋꿋이 만들어가면서 말이다.
작업용 카메라(소니 A7R3 + 24-70mm F2.8 GM)로 찍은 사진은 대부분 만족스럽다. 높은 색 재현력, 빠른 AF 기능은 말할 것도 없고, 고화소가 장점인 카메라이기 때문에 편집(크롭)이 매우 용이하다. 인물, 제품, 자연 그 모든 것을 포토그래퍼의 역량대로 마음껏 구현할 수 있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비싸고 무겁다. 그러니까 비싸고 무거운 카메라는 특별한 날에만 사용하게 된다. 들고 나가려다 이내 포기한다.
필름 카메라는 결과물이 취향에 부합한다면 가볍게 들고 다닐 만한 스냅용 카메라로 손색없다. 물론 부지런한 사람에 한해서다. 필자는 현상과 스캔이 미치도록 귀찮은 사람이다. 결과물을 받아보기까지 대략 반년 정도가 걸린다. 있으나마나 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매했다. 작고 가벼운데 예쁘고 결과물도 만족스러우면서 기동성까지 훌륭한 리코 GR3. 국내 출시일 2019년 3월 25일(tmi인데 필자의 생일입니다), 2424만 화소, 최대 개방 조리개 수치는 F2.8, 환산 시 28mm 화각. 리코 GR3의 대략적인 스펙은 이렇다. 전작인 리코 GR2보다 훨씬 개선된 AF 기능과 추가된 동영상 기능도 스펙이라면 스펙이다. (최근 출시된 카메라 중 동영상 기능이 없는 카메라는 없으니까 굳이 어필하진 않겠다.)
구매에 앞서 리코 GR3에 대한 사용자들의 리뷰를 살펴봤다. 결과물을 보여주며 '무보정 원본'이라는 걸 강조하는 유저들이 많았다. 보정 없이 훌륭한 색감을 표현할 수 있다는 건 리코 카메라만의 무드가 있다는 소리일 것이다. 카메라에 기본 내장된 필터들도 자주 언급됐다. 그중에서도 필름 카메라의 빈티지한 느낌과 흑백사진을 기가 막히게 담아낸다고 했다. 더불어 포토그래퍼의 세컨드(second) 카메라로 추천한다는 글들이 상당히 많았다. 사실 이 말은 칭찬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카메라와 친숙한 사람이어야 사용하기 수월하다는 뜻일 테니 누군가에겐 단점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스마트폰 카메라 성능이 우수해지면서 디지털카메라, 일명 똑딱이 디카는 설 자리를 잃었다. 아무리 가지고 다니기 편하다 해도 매일 손에 쥐고 사는 스마트폰만 할까. 화소 수의 차이도 크지 않다. 오히려 더 나은 핸드폰도 수두룩하다. 사진을 옮기는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으니 데이터 관리도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털카메라 구입을 강행한 이유라면,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이 불만족스러워서다.
필자가 사용하는 스마트폰 기종은 아이폰 XR이다. 가성비 좋은 기종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획기적인 기능은 없다. 아이폰 11 pro의 경우 (무려) 광학 줌 인, 아웃이 가능하고 '야간모드'라는 탐나는 기능이 탑재되어 있다. 스마트폰으로 장노출 촬영이 가능하다는 거다. 아이폰 XR의 '인물 모드'는 오직 인물에만 적용되어 쓰임새가 모호한 반면, 아이폰 11 pro는 어떤 사물에도 섬세한 심도 표현이 가능하다.
나도 좋은 카메라가 장착된 스마트폰 유저라면 리코 GR3를 구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없다. 할부금? 아직 한참 남았다. 1년도 채 사용하지 않은 스마트폰을 당장 바꿔버릴 용기도 없었다. (놀랍게도 새 카메라를 구매할 용기는 있었음..)
리코 GR3를 사용한 지 3개월 정도가 됐다. 만족스럽다. 무엇보다 '사진 좋아하는 사람' 티가 적당히 나서 좋다. 이 가볍고 예쁜 카메라로 유난스럽지 않게 '사진 부심'을 부릴 수 있다. 우연히 마주한 순간들을 스마트폰보다 더 고급스럽고 밀도 있게, 생생하고 풍성하게 담아낼 수 있다. 큰 노력 없이도 당장 엽서로 만들어 판매할만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만족스러운 사진을 찍은 후, 저도 모르게 내뱉는 말이 있다. '이거 완전 DSLR처럼 나왔다', '이거 폰으로 찍은 거야? 카메라로 찍은 줄'라는 등의 말들이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재현하고자 하는 것이 디지털카메라의 결과물이라면, 나는 과감히 리코 GR3를 구매하겠다. 스마트폰과 디지털카메라 사이 어디쯤에서 방황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리코 GR3를 추천하고 싶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만 유난스럽게 보이기 싫다면, 보다 나은 결과물을 원하지만 무거운 것은 싫다면, 스마트폰 할부금이 꽤 남아 기변할 수 없다면. 대안은 어쩌면 하나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