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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아 Oct 31. 2020

몸 공부는 철학공부

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지점

병이 가르치는 것

엄마가 수술을 받으면서 다인실에 입원했습니다. 6인실이 나서 반가운 것도 잠시 잠을 못 잘 정도로 시끄럽더군요. 간이침대에서 자면서 며칠 동안 환자 6명과 그 가족들의 가족사를 낱낱이 알고 말았습니다.

그중에서 옆 칸에 있었던 환자는 정말로 응급 환자였는데, 병실이 없어서 하루 반 정도 머물렀어요. 그는 예순 살이 좀 넘어 보이는 말기 폐암 환자였죠. 무려 일곱 차례 항암치료를 받은 전력이 있고, 숨이 너무나 가빠서 기계의 힘을 빌려서 숨을 겨우겨우 쉬었습니다. 한밤에 응급 호출도 여러 번, 가쁜 숨이 밤새 들리니까 같이 있는 것만으로 아슬아슬하더군요.

제 또래로 보이는 자식 셋이 돌아가며 왔습니다. 서로 커튼을 쳐놓았지만, 사생활이란 없어요. 소리가 다 들리니까 오픈과 마찬가지예요. 그러다보니 재미난(?) 사실을 알았습니다. 중병에 급하게 입원한 환자나 가족들은 얼마나 힘들까 싶었는데, 도리어 그런 상황에 가족들이 너무 익숙했습니다.

급박하게 간호사를 호출해서 온갖 기기를 끼웠다 뺏다 하는 상황에서 아들은 엄마한테 그간 섭섭했던 이야기를 계속하며 짜증내요. 몇 시간 후에 달려온 딸은 돈 타령을 합니다. 엄마는 가쁜 숨을 더 가쁘게 몰아쉬면서 자식들에게 안 하면 좋을 잔소리와 욕을 섞어서 해요.

곧장 죽을 것 같은 환자와 그 가족들은 종일 그러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엄숙하거나 고요한 시간을 갖는 게 아니고, 삶은 그저 어제처럼 흘러가는 느낌이었어요. 환자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도 마치 아무 것도 끝나지 않을 것처럼 말이죠. 하긴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 가길 몇 년째 해왔다면 그 상황은 일상 중 하나일 뿐이겠지요.

또 식구들이란 원래 큰일로 모이면 크고 작게 이해관계로 다투면서 우왕좌왕하잖아요. 중요한 말은 결코 하지 못하죠. 마주하기 끔찍한 일이 닥칠수록, 더욱 쩨쩨한 이야기와 짜증으로 지나게 마련이에요. 아니 그렇게 말고는 어떻게 힘든 현실을 마주할 수 있을까요?


완벽한 타인

그 어디에도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음악이 깔린다든가 누군가 감동적인 전갈을 갖고 온다든가 모두를 찡하게 할 기억의 소품 따위는 등장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그 모든 상황을 제대로 보려면, 저처럼 옆에 환자의 침대, 그 옆에 간이침대에 새우등을 하고 누워 있는 이름 모를 ‘완벽한 타인’이어야 하죠.

실제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환자와 그것을 지켜보기 힘들어 자꾸 딴 이야기를 하는 가족에게는 ‘죽어감과 가족’ 같은 주제는 곤란하죠. 진짜로 현실을 살아가는 당사자에겐 마주하기 버거울 따름입니다.

그들은 그 밤이 그해에 벚꽃이 가장 절정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까요?

아름다운 봄밤이 어머니의 얼마 남지 않은 숨 사이 사이로 식구들의 짜증과 화 속에서 그렇게 지나더군요. 단지 이름 모를 완벽한 타인인 저는 골똘히 커튼 뒤에서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 감히 꺼내지 못하는 ‘죽어감과 가족’이나 ‘절정의 봄밤’ 따위를요.

실은 저도 제 앞에 닥친 현실을 피하고 싶어서 남의 이야기에 그렇게 귀 기울였는지도 몰라요. 수술을 끝낸 엄마와 그 상황을 마주하는 게 두려웠습니다. 차라리 타인의 가족과 죽음, 절정의 봄밤 따위를 생각하는 편이 편했거든요.

그날 밤 부드러운 회피 끝에 빙그레 웃었습니다.

몸이 우리를 가르치는 지점은 여기에 있구나.

병이나 약해짐, 죽음을 마주하고서야 삶을 더 자세히 볼 수 있나 봐요. 몸으로써  삶을 바라보면 절로 철학공부가 됩니다. 몸은 병으로 늙어감으로 끝내는 죽음으로 우릴 가르치고 있어요.


"에이, 이런 우울한 이야기는 하지 말자."

한번은 친구들끼리 어쩌다 죽음이 이야깃거리가 되었는데, 한 친구가 이렇게 커트를 하더군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를 우린 언제나 원하죠. 죽음이나 늙음, 병 같은 화제는 금세 분위기를 흐립니다. 그렇지만 삶은 소녀 같은 바람으로 채워지지 않죠. 물론 어른인 우리는 그 사실도 이미 알고 있죠.

그래서 누군가는 '그러니까 행복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하겠지요.

또 다른 누군가는 '그러니까 죽음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겠지요.

여러분의 의견은 어느 쪽인가요?

죽음과 행복은 반대편의 이야기인가요?

서로를 잘 비춰주는 이야기인가요?

마치 이 질문에 대답하듯, 며칠 뒤

절정의 봄밤이 지나고 벚꽃은 졌습니다.

죽음과 행복이 어떤 관계인지는 내년 봄에 벚꽃이 다시 알려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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