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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asson Oct 20. 2023

L에게 보내는 편지

#06. n번의 계절 (스웨덴과 한국의 계절)

2023.09.12

리나에게,



안녕?

널 방금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카페에 들렀어.

이제 더 탈 곳이 있나 싶은 내 얼굴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더라고.

사실 화장실이 조금 급하기도 했어.

널 낳은 뒤로 방광에 탈이 났는지, 요도에 문제가 있는 건지, 조절하기가 힘들더라고.

내 친구들이 나를 벤티 사이즈라고 부를 정도로 대용량을 자랑하던 방광이었는데 말이야. (TMI)

이게 혹시 요실금의 시작인가? 싶더라고.

흔한 출산 후유증이래. 불편하긴 해도, 상관없어.

너를 선물로 받았는데 내 방광이며 요실금이 대수겠어?

열심히 케겔운동하면 개선될 수 있대.


네가 어린이집에 등원하면, 네 아빠 점심시간에 이렇게 집 앞바다에서 수영을 했어.


하-, 나의 34번째 여름은 어째서인지 아직도 끝날 기미가 안 보여.

6월부터 9월까지 길고 긴 여름이야.

한국에서도 그렇게 더웠는데 몰타는 더 덥다.

한국은 처서가 지나고 더위가 한풀 꺾였다는데,

몰타의 더위는 사그라들 기미가 안 보이고

내 얼굴에 기미만 더 생기는구나.

그래도 너 살 안태우려고 내가 정말 많이 노력하고 있어.


내가 어렸을 때,

여름의 끝자락에 다 달았을 때면 네 할아버지가 늘 하던 말씀이 있어.


'처서가 지나면 거짓말처럼 아침저녁 기온차가 생겨서 살만해.
모기 주둥이도 처서 지나면 삐뚤어지거든'


당연히 열몇 번째의 여름을 지날 때에는 그 말이 와닿지 않았지.

봄은 따뜻하고 여름은 더운 거고 가을은 쌀쌀한 거고 겨울은 추운 거니까.

그 사이사이 계절이 어떻게 변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뭐가 달라지는지 관심이 없었으니까.

 


스물몇 번째의 여름에 비로소 계절의 변화가 와닿더라.


정말 신기하게도 처서가 지나면 아침저녁으로 기온차가 생겼고,

지독한 무더위 속에 숨통이 트이더라.


내가 나고 자란 대한민국은, 4계절이 있는 나라야.

네 아빠가 나고 자란 스웨덴도 4계절이 있어.

둘 다, 겨울이 무척 매섭고 추운 나라라는 공통점이 있지.


하지만, 이내

뉴트럴톤의 추운 광경들 속에 연약한 연두색이 보이는데

이제 봄이 시작되었다는 뜻이야.

곧 따뜻한 계절이 오겠구나~ 하고 하루하루 지내다,

문득 기온이 포근해졌다는 걸 느낄 수 있어.


그때 주위를 둘려보렴.

대지에 솟아난 만물들이 연두색, 노란색, 분홍색, 자주색, 파란색으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을 거야.

옷차림이 점점 가벼워진단다.

겉에 입던 외투만큼이나 무거웠던 겨울이 지나간 거야.

새로 피어난 꽃들은 봄과 함께 끝나버려.

다음 봄을 기약하는 거야.


내가 필터를 넣어서 화질이 안 좋은데, 스톡홀름 쿵스트레고덴의 벚꽃이야. 너도 같이 갔었어.
이건 한국, 내가 살던 동네에 핀 벚꽃
저기 보이는 사람은 네 할아버지. 내 가족이 늘 운동하러 가던 동네 공원에 만연한 봄기운.





그리고 이제 초록색 이파리들이 돋아나.

늦봄과 초여름 사이의 색, 신록의 계절인 거야.

신록은 부지불식간에 짙은 초록색으로 변한단다.


나는 그 사이 이따금 내리는 비를 좋아해.

찬란한 늦봄의 눈부심에 내 시야 빛 번짐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그때 내리는 비는 눈부시게 빛나던 세상에 명도와 채도

조절 해주거든.

푸른 잎들은 물기를 머금어 더욱 푸르러지고

먼지 내려앉은 갈색 나뭇가지도 물기를 머금어 더욱 진한 갈색이 된단다.

이 초여름의 푸르름은 비가 내린 뒤에 굉장히 선명해져.


이때 내리는 비의 냄새도 좋아하거든.

공기 중에 가득 퍼진 비의 냄새.

아파트 단지에서 주기적으로 잔디를 깎는데 그때 마침 비가 내리면,

사방에 진동하는 허리 잘린 잔디의 짙은 냄새가 물냄새와 섞여 더욱 증폭되거든.


내가 좋아하는 풍경이야. 비를 잔뜩 머금은 여름의 나무들. 엄청 선명해지지.
북한산, 하이킹 가서 찍은 건데, 하필 비가 와서 저 날 많이 넘어졌어. 바위길이 많은 산이었거든.
이건 스웨덴의 여름밤. 스웨덴의 여름은 해가 지지 않아. 백야거든. 아빠랑 산책 가서 찍은 사진이야.
이건 너랑 나랑 산책 가서 찍은 스웨덴 집 근처 여름 풍경이야.




여름이 덥긴 해도 창문을 내다보면 펼쳐지는 끝없는 초록색에 눈이 편해지긴 해.

리고 너의 옷차림은 더욱 가벼워지지.

그렇게 정신없이 덥다 보면 어느새 가을이 찾아와.

하늘이 높아지고 햇살이 따뜻해지거든.

기분 좋은 이 계절은 옷도 가장 멋스럽게 입을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컬러톤의 메이크업도 가장 잘 어울려.


그나저나, 네가 나중에 커서 메이크업을 좋아할지 너무 궁금하고 설렌다. 너랑 화장품 쇼핑도 같이 하고, 옷이랑 신발도 같이 공유하고, 쇼핑이 끝나면 카페에 앉아 수다도 떨고 싶거든.


이 계절에 나는 테라스에 앉아 한잔 하는 걸 좋아해.

커피든 술이든. 피부에 감기는 온도가 너무 기분이 좋거든.

그리고 문득 주위를 둘러보면 초록초록했던 세상이 노랗고 붉어져있거든.

이 계절에 분위기 좋은 노천카페나 산에 가는 걸 참 좋아해.

찬란하게 물든 나무들과 산이 엄청난 장관을 이루거든.

눈물 나게 아름다운 이 계절은 참 빠르게 지나가.

단풍구경을 위해 각 지역별 단풍 절정기를 체크하고 나들이를 계획하는 게 이 계절, 가을.



2017년 가을, 설악산에서 찍은 가을풍경
저기 달이 살며시 보이지? 한국에 가을 풍경
이건 한국 집 창문 밖으로 보이는 가을 풍경
단풍나무와 할머니 할아버지
이건 스웨덴집 가을 풍경
네가 뱃속에 있을 때, 하루에 만보씩을 걸었는데 그때 늘 보던 집 앞 가을 풍경이야.
이건 네가 탄 유모차를 미는 아빠의 뒷모습과 스웨덴의 늦가을 풍경이란다




그리고 또다시 겨울이 성큼 다가와.

춥고 매섭지만 하얗고 포근한 계절, 겨울.

너와 나, 그리고 아빠가 태어난 계절.


나는 이런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감사하기 시작한 지 몇 년 되지 않았어.




네 아빠와 늘 걷던 동네의 겨울 풍경
스웨덴집 창밖으로 보이는 겨울 풍경
한라산에 내려앉은 겨울의 풍경



그리고 지금, 나는 34번째 여름을 보내고 있지.

너는 2번째 여름인 거야.

우리가 올해 여름을 스웨덴, 한국, 몰타, 일본에서 보냈고,

아마 이 때문에 여름이 유독 길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싶어.


34번째.

새삼스러운 숫자더라.

많으면 많은 숫자지만,

참 얼마 안 되는 숫자기도 하고.

34년이라고 하면 길지만,

34번째라고 하면 턱없이 짧아보이거든.

나는 헬스장에서 스쿼를 1분에 34개 이상을 할 수 있는데 말이야.

겨우 34번째 여름이라니.

그리고 나는 앞으로 몇 번의 여름을 더 보낼 수 있을까?

100번째 여름을 보내고 눈을 감고 싶다는 건 내 은밀한 장수 소망이야.


너는 몇 번째의 여름에서 계절의 변화에 감동하고 감사할 수 있을까.




34든 100이든,

앞으로 우리가 함께할 수많은 계절을

우리끼리의 소중한 경험들로 장식해 볼 생각에 무척 설레.


나는,

네가 살면서 바뀌는 계절에 소소히 감동하길 바라.

네가 계절의 변화를 둘러볼 수 있을 만큼 여유롭게 살길 바라.

네가 4계절이 없는 곳에 살더라도 그 계절을 즐기며 살길 바라.

너에게도 좋아하는 계절이 생기길 바라.

너에게도 좋아하는 계절의 색깔과 냄새가 생기길 바라.

어느 순간,

너에게도 계절마다 추억할 거리가 가득 생기길 바라.

그리고 네가 그 즐거운 기억과 경험과 추억을 영양분 삼아

밝고 아름답게 크길 바라.



-Sliema, 'Coffee Fellow'에서 윤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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