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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ttitude Jun 15. 2023

기억의 메아리로 지연된 죽음

이토록 평범한 미래 (단편)를 읽고

이제 나는 10분 뒤에 죽는다  

   

어떻게 죽는 게 좋을까? 여기서? 축 늘어진 팔을 보니 올바른 자살 방법에 대한 미국 드라마 대사가 생각났다. 칼로 그을 때 손목의 혈관에 수직이 아니라 줄기 그대로 따라서 그어야 한다는 것. 더불어 아스피린을 먹으면 피를 용해되고 따뜻한 물에 들어가면 혈관을 팽창시키면 한층 수월해진다는 것.


근데 가족이 발견하면 충격이 클 것이다. 나의 죽음과 별개로 욕조의 피바다 때문에.  아파트에 소문도 나겠지. 가족들 뒤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릴 것이다. 아예 다른 곳으로 갈까? 내 시신을 발견한 사람도 충격받지 않을까? 누군가한테 피해 주기 싫은데.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까? 가족들이 시신이라도 찾고 싶어 며칠을 밤새지 않을까? 나 때문에 경찰 인력들도 동원될 것이고. 천성적인 오지랖과 완벽주의가 재발해서 죽음마저 미룰 줄이야. 죽는 단계에서 이래저래 지체되니 일단 보류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며칠 뒤 있을 장례식장을 기억했다. 내가 생전에 가장 밝게 웃었던 사진이 영정사진으로 놓여있고 오른쪽에 가족들이 보인다. 동생은 울다 지쳐 영전 옆방에 누워있다. 조금이라도 기력을 찾으면 '형아~!!' 하고 팔을 마구 휘젓다가 다시 쓰러지기를 반복한다. 9살의 나이 차이로 그간 짓궂게 군 일이 많아서 죽어서까지는 그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형으로서 못할 짓을 한 거 같다. 엄마는 아빠 옆에 주저앉아 있다. 엄마의 눈은 눈물이 빠르게 고갈되어 버린 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 어딘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빠만 혼자 겨우 상주로서 예의를 차리고자 서있지만 계속 눈을 질끈 감으신다. 손님들이 절할 때마다 아빠가 엄마에게 눈치를 주지만 이내 포기한다. 엄마와 동생이 일어서기 어려울 거라는 걸 아신 거다.


친구들이 왔다. 평소 장난과 웃음만 주고받았던 녀석들이 펑펑 울어대니 낯설다. 직장 동료, 사교 모임을 함께 했던, 올지 안 올지 애매했던 지인들이 왔다. 훌륭한 사람일수록 장례식장에 오는 사람들이 많지 않던가. 집돌이에 외톨이로 보낸 세월이 길었던 것 치고는 제법 방문자 수가 많았다.     


방문한 분들에게 오늘은 그저 수많은 어제와 같이 지나갈 것이다. 친구들의 삶에서 나는 스크랩한 사진처럼 언제 꺼내질지 모른다. 이렇게 존재로도 기억으로도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이 슬퍼서 죽음이 두려웠다. 그럼에도 죽음을 택한 건 내가 없는 편이 더 좋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슬픔을 딛고 다시 열심히 잘 살아가는 사람들 많으니까 조금만 지나면 우리 가족도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장례식을 보다 보니 슬픔이 계속 가슴 시리게 남아 있는 가족들이 떠올랐다. 항상 기억해 주고 죽음을 슬퍼해 줄 이가 있는 것은 기쁘지만 우리 가족이 이렇게 계속 고통받는 걸 원한 것은 아니었다.   

   

아, 생각해 보니 스스로 죽는 건 이래저래 끝이 좋지 않다. 이러다 보니 10분이 훌쩍 넘었다. 하다 하다 자살마저 미루는 왼벽주의 인간은 처음이었는지, 질려버린 저승사자는 그대로 떠난 뒤 한동안 소식이 없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기억하다     

김연수 작가의 신작 단편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의 첫 단편에 같은 제목의 소설이 실려있다. 책에서는 알고 싶었던 것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고, 현재 겪거나 과거에 겪고 남은 상처에 대한 위로, 이미 가진 생각에 대해 확신을 얻을 수도 있다. 이번처럼 내가 경험했던 순간들과 연결되는 이야기는 더욱 공감된다.


소설 내용 중에서 '재와 먼지'라는 소설이 등장한다. 요약하면, 부부가 동반자살 하는 시점에서 처음 만난 순간으로 하루하루 거슬러 살아간다. 이것이 두 번째 삶이다. 과거를 다시 살면서 함께하는 지금을 만들어준 과거의 기적을 향해 살아간다. 그리고 다시 세 번째 삶을 산다. 서로가 만나 행복했던 미래를 기억하며 산다.     


책의 표현대로 나는 스스로 미래를 기억해 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좋은 미래는 아니었지만 이 순간 살아있어야 할 이유를 찾아준 기억이었다. 미래를 기억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항상 우리는 꿈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삶을 살지 인생 선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정물화 그리듯이 보고 그렸다. 어떤 이는 미래를 글로도 남기고 말로도 남긴다. 확언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뿐, '기억'과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소설 내용 중 재미있는 것이, 작가는 언어가 상상이나 세계관을 축소하고, 왜곡하고, 개념을 단정 지어 버리는 등 역기능을 설명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했다. 언어는 입으로, 손으로 사용할 수 있어서 내 맘대로 다룰 수 있다. 나는 소개된 역기능 중 하나로부터 오히려 도움을 받은 적 있다. 무한히 커지는 나쁜 생각을 글로 적어보면 생각만큼 심각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최근 뉴스에서 자살에 관한 통계를 보면 믿기지 않는 수준이다. 내 나이대까지 하루 평균 37명, 매 시간 1명 이상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안타깝게도 통계를 다루는 이들은 죽는 사람만 알지 나 같은 사람을 모른다. 정신신경과에 상담받고 극복한 사람, 약 처방으로 연명하는 사람,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사람, 특이하지만 완벽주의로 꾸물대다가 살아남은 이들의 통계가 없으니 상처받은 이들에게 동질감보다 절망이 더해진다.      


미래를 알 수 없으니 불안해하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니 살 이유를 못 찾는다. 자신에게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미래라도 기억해 보자. 거기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도 있다. 가장 괴로운 순간 떠올려야 하는 기억을 해내기에 10분은 충분하다. 

      

밖에서 갇다가 나를 마주치는 사람들은 살아있으니 걸어 다니겠거니 당연하고 대수롭지 않게 볼 것이다. 그들은 내가 가진 장례식장의 기억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각자의 삶과 인생에 서로 알리가 없는 기억들이 있다. 찰나의 순간 다른 선택으로 당신 눈앞에 서있는 나 기적이지 않은가. 나도 그렇다. 그날 이후 만나는 모든 숨 쉬는 시간들, 당신을 포함한 모든 인연들이 기적이고 감사하다.


사진: UnsplashAron Visu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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