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델몬트 Feb 09. 2023

여행을 생각하며 엑셀을 켠다

준비하는 즐거움

    "여행은 준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나의 철학이자 믿음은 여행을 다닐수록 공고해지고 있다. 여행지가 정해지고 제일 먼저 시작하는 일은 이전 여행지의 일정을 정리해 놓았던 엑셀 파일을 켜서 파일 제목을 새로운 여행지로 바꾸고, 날짜와 요일, 도시 셀부터 새로운 내용으로 채우는 것이다. 최근 가정 내 일신상 이유로 태국에 갈 일이 자연스레 많아진 나는 "방콕" 파일을 "치앙마이" 파일로 바꾸었으며, 설레는 2월 날짜들을 채웠다.



    비행기를 예매하고 나면 구글맵, 블로그, 트립어드바이저, 지인들의 생생한 후기 등으로 대략적인 여행계획을 짜고, 거의 동시에 동선에 최적화된 숙소를 예매한다. 주로 층간소음이나 위생 이슈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해 한 숙소당 2박을 넘기진 않는 편. 숙소 리뷰와 사진들을 보다 보면 이미 나는 인피니티풀에서 헤엄치고 있고, 알찬 조식 이후 찐하게 내린 커피도 한잔하고 있다. (다만 GYM은 좀처럼 이용하는 상상이 들지 않는다.)



    최근엔 치앙마이 맛집들을 점심, 저녁을 오가며 채워 놓고는 그 사이사이 관광지를 채워 나갔는데 뭔가 동선이나 일정이 맘에 들지 않았다. 구글맵을 보며 그 길들을 쭈욱 걸어본다고 상상했을 때, 뭔가 일정이 꼬이거나, 너무 더울 때 많이 걷게 되거나 할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사나흘 동안 엑셀을 만지작 거렸다. 그렇게 이 여행지를 저 날짜로, 저 여행지를 이 날짜로 옮기고 만져 완성된 엑셀상 여행 계획은 동선, 강약 조절, 바이브, 힐링&칠링, 식도락, 맛 따라 멋 따라 모든 면에서 완벽, 요즘말로 갓-벽이랄까. 기립박수 감이었다.  



    MBTI상 SJ로서 여행계획을 짜지 않고 여행을 가는 것은 무언가 불안한 일이며, 가서도 웬만하면 다 지키는 편이다. 물론 여행 도중 몸이 피곤하면 일정을 생략하고 널브러져 있기도 하고 예정에 없었던 거리를 거닐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번엔 비행기 티켓이랑 숙소만 끊었어, 뭐 할진 가서 생각해 보려고."라는 친구가 있으면 어떻게 불확실성의 세계에 스스로 몸을 던질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SJ 커플에게 있어서 ESFJ(공급자)인 내가 ISTJ(검사자)인 아내가 좋아할 만한 계획을 짜서 보여주고 흡족해하는 아내의 반응을 보는 것, 그리고 나의 '여행 짜기'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도 나로서는 여행 준비가 행복한 이유 중 하나이다. (보고 있니?)



    사실 여행은 여행지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감가상각이 이루어질 수 있다. 기대 이하의 풍경에 굉장히 실망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고 인종차별이나 불친절함으로 마음이 상하는 일도 생긴다. 또 어떨 때는 너무 멋진 풍경이나 분위기에 행복해서 이게 인생이고 여행이구나 하며 감동하기도 하고, 난생처음 먹어보는 음식에 "짱이다..!" 같은 저렴한 맛 표현을 하며 감탄하기도 한다.



    반면 여행 계획을 짜며 준비를 하는 일에는 감정의 감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직 기대에 기대를 더하는 더하기(+)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여행 계획 짜는 일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언젠간 나도 남이 짜 준 계획대로 깃발을 따라다니는 여행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처럼 여행 계획을 마무리한 날에는 이제 캐리어 끌고 나갈 새벽만 기다리면서 그날부터 일어날 여행의 나날들을 기다리고 상상하는 여행의 묘미를 즐기며, 또 입맛을 다시는 것이다.




    다음에는 왜 여행이 행복한 것인지 생각해 봐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난, 지금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