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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공은 Jul 30. 2022

내 꿈은 파워블로거였다

문화생활을 다방면으로 좋아하다 그것만이 일관성이 된 멀티덕후의 이야기


내 꿈은 파워블로거였다. 블로그를 시작하던 순간부터 파워블로거가 될 거라며 야심 차게 꿈꾼 건 아니었다. 블로그에서 책 이야기를 시작하고 시간이 제법 흘렀을 즈음 파워블로그에 관심이 갔다. 그러나 나는 파워블로거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나는 하나의 주제에 만족하지 못하고 드라마 이야기를 시작했고, 잠시지만 야구 이야기도 했고,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지금은 연극과 뮤지컬 이야기도 심심찮게 꺼낸다. 단계별로 지나온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이야기를 나란히 하고 있다. 모름지기 ‘파워블로그’ 타이틀을 가진 블로거라면 하나의 분야를 심도 있게 꾸준히 다루어야 할 터. (답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내가 본 파워블로그들은 그랬다) 다시 말해 정체성이 확실한 것이다. 누가 봐도 이 사람은 책 블로거, 요리 블로거, 뷰티 블로거라는 생각이 들게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책을 이야기하는 글에서 영화 이야기를, 영화 이야기를 하는 글에서 연극 이야기를, 때로는 한 편의 글에서 그 셋을 동시에 이야기할 때도 있었다. 파워블로거는 둘째치고 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고민하던 차에 정세랑 작가님의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를 읽는데 아래의 구절을 만났다.



“아니, 엄마는 무슨 국전에도 끼고 국전 반대쪽에도 끼었어?”

“추상에도 기웃, 극사실주의에도 기웃했네.”

“민중미술 평론하다가 포스트모던으로 넘어가다니 엄마야말로 박쥐다.”

변명하자면 내가 그 사람들을 다 좋아했다. 그것만이 나의 일관성이었다.

-정세랑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 p.307-308



심시선이 그 사람들을 다 좋아했듯 나는 그것들을 다 좋아한다. 주변에 영화를, 책을, 전시를, 드라마를 하나씩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 모든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잘 없으니 나도 이것만이 나의 일관성이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이런 내 생각에 확신을 안겨준 책이 있다. 민음사TV(출판사 민음사의 유튜브 채널) 조아란 부장님 소개로 접한 에밀리 와프닉의 『모든 것이 되는 법』이 그 책이다. ‘갓생사는 직장인의 유튜브 무물보’라는 영상에서 조아란 부장님은 책의 띠지 문구를 보고 못 참고 샀다며 이 책을 소개한다.

‘최고로 잘하는 건 없어도 뭐든 중간은 하는 이들을 위한 이상과 현실의 균형 찾기 프로젝트’. 너무 우리 이야기 아니냐며 그래서 샀다는 코멘트도 덧붙였다. 1시간 20분이 넘는 긴 영상에서 스쳐가는 정도의 소개였는데 무척 흥미로웠다.

저자는 여러 분야에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습득하기 좋아하며, 새로운 시도를 즐기는 경향이 있는 사람을 ‘다능인(Multipotentialite)’으로 정의한다. 



여러 분야에 대해 많이 알고 있거나 백과사전식 지식을 지닌 박식가, 다양한 분야에 흥미가 많고 지식이 있는 만물박사, 다양한 업무를 해낼 수 있거나 손재주가 있는 다재다능한 팔방미인, 기술이나 관심 분야 혹은 몰두 대상이 다양하지만 전문화되지 않은 다방면 인재, 수많은 비전문 분야에 강렬한 호기심을 지닌 스캐너 등 다능인을 지칭하는 용어가 다양했다.



결국 중요한 건 당신 자신에게 딱 맞는 느낌의 단어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중 가장 공감되는 용어를 사용하고, 그렇지 않다면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거나 당신만의 용어를 만들어보자.

-에밀리 와프너 『모든 것이 되는 법』 중에서



이 책을 읽기 전부터 나는 자기소개란에 ‘멀티덕후’라고 써넣곤 했는데 위 문장을 통해 나만의 용어를 이미 갖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어느 트랜스젠더 과학자 벤 바레스의 자서전을 읽고 쓴 글에서 세상을 뒤집은 위대한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를 이야기하는 사람.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에 대해 소설과 영화와 연극에 관해 떠들 수 있는 사람. 프랭크 시나트라의 음악을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과 연극 <더 헬멧>으로 이야기하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라고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파워블로거라는 꿈은 첫 문장에 썼듯이 과거형이다. 어느 한 분야를 깊이 파지 않아서 파워블로거가 되지 못했을까? 아니다. 그냥 내 역량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꿈을 꾸는 과정 안에서 나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나에게 딱 맞는 느낌의 단어를 찾아낼 수 있었으니 깨나 값진 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덕후의 이야기답게 이 모든 글을 담아낼 카테고리의 이름을 ‘덕후감’이라고 지었다. 이 덕후감을 알차고 즐겁게 쓰는 것이 나의 새로운 꿈이다.



추신.

2017년 겨울, 함께 글을 전공한 친구의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쓰는 삶’보다 읽고, 보고, 듣는 삶에 치우쳐 살았구나 싶은 생각에 우울했던 적이 있다. 나의 토로에 자신이 좋아하는 관심사에 대해 꾸준히, 열정적으로 임할 수 있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고, 본인 역시 그런 욕심을 가져본 적이 있어서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 수 있다고 응원해주었고, 이듬해 개설한 브런치의 첫 독자가 되어준 오랜 친구 은비에게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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