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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밑하나 Mar 02. 2024

엄마와 딸의 거리

<빙그르르 귀촌라이프>-6

덕산에 온 뒤로는 서울에서 하룻밤 이상을 지낸 적이 없다. 꼭 필요할 때에만 서울에 갔고, 웬만하면 당일로 돌아왔다. 서울을 벗어난 지 3년 만에 처음으로 그 시끄러운 도시에서 다섯 밤을 지내게 되었다. 이유는 엄마다.


덕산에 온 지 1년이 좀 넘어가던 즈음에 엄마의 암 진단 소식을 처음 들었다. 

자식들에게 이야기하기 한두 해 전에 이미 2기 진단을 받았으나 모종의 사정으로 4기에 간 전이까지 진행이 되고 난 후에 오빠의 닦달로 털어놓으신 거였다. 한 달 정도를 끙끙 앓던 오빠가 마음이 무거워 나에게도 알려주었다. 


소식을 들은 직후에 나는 다시 서울로 가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엄마 곁으로 가고 싶었다. 그냥 다시 알바를 해도 좋고, 강사일을 해도 좋으니 엄마가 조금이라도 나을 때까지만 서울에 더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자주 얼굴 보고, 잔심부름이라도 해드리면서 엄마와 아빠가 견뎌야 할 투병의 무게를 함께 나눠 지고 싶었다. 


부모님의 대답은 역시나 "NO"였다. 이곳에서 딸이 자신의 인생을 잘 지탱하며 살아가주는 것이 그들을 돕는 것이라는 이유였다. 당시엔 납득이 됐었다. 성인이 된 이후 나는 서울에서 줄곧 불안정했고, 삶을 포기해 가는 모습을 감추지도 못하고 부모님에게 모두 들켜버렸다. 그런 딸을 젖은 눈동자로 지켜보며, 지켜주던 부모님이었기에 이제야 겨우 밝은 모습을 되찾아 가는 딸을 흔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덕산에서 정말 열심히 살았다. 시골이어도, 시골이라서 할 수 있는 것은 웬만하면 다 도전해 보고, 실패해 보고, 많이 만나고 헤어지며 사람답게, 20대 청춘답게 힘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노력했다. 내가 가열차게 살아가는 것으로 부모님을 안심시켜드리고 싶었다.


그러는 사이 부모님은 더 나이가 들었고, 더 작아졌다. 엄마는 방사선과 항암 치료를 병행하며 부작용을 겪고, 병원 때문에 서울집을 유지하면서도 시골집을 찾아 아빠와 여행하듯 방랑하듯 두 분이 서로를 의지했다. 두 분이 서로를 의지한다고, 그래서 자식들이 끼어들 틈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괜찮다고 믿고 싶었던 것 같다.


최근 뼈 전이가 진행되었다는 진단과 함께 4일간의 방사선 치료가 엄마에게 처방되었다. 진단받은 날 밤 부모님과의 통화에서 엄마는 웃다가도 울먹거렸다. 이제는 자식들에게 조금은 의지하고 싶다고, 아빠가 너무 정신이 없다고, 아빠가 지칠까 봐 겁난다고 했다. 방사선 치료를 받는 동안 서울에 가 있겠다는 나의 제안에 아빠는 선뜻 '그럴래?'라고 하셨다. 예전 같았으면 부담스럽다고, 정신없다고, 한사코 거절했을 텐데. 


그 통화 이후에 며칠을 울었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가 장난스럽게 '너는 엄마한테서 멀리 떨어져 살지 마'라고 했던 말이 가슴에 사무쳤다. 며칠 부모님에게 가 있으려 하니 정리하고 조율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대구에 계신 외할머니가 아프셨을 때마다 서울에서 가지 못하는 엄마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자기 삶과 부모님 걱정을 양 쪽에 올려두고 저울질이라도 하는 듯한 죄책감이 들었을까.


가족들과 함께 지내던 서울을 떠나 덕산으로 귀촌하고 내 삶은 많이 밝아졌다. 부모님과의 물리적 거리는 떨어졌지만 마음으로는 더 애틋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힘들 때 소리 내서 "엄마"를 부르는 날이 많아졌다. 엄마도 설거지를 하다가, 방바닥을 닦다가 "엄마"를 부르곤 했다. 그렇게 부르면 마치 방 하나 건너에 엄마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 많이 자책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마음속으로는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내 인생이 제일 중요하다고 엄마의 아픔을 조금은 외면하고 싶었던 것 아니냐고 나를 후려치고 있지만, 그래도 이대로 있으려고 노력 중이다. 며칠 정도라도 부모님 곁에 머물러보는 시도를 하면서, 또다시 나의 삶으로 돌아오는  시도도 해보려고 한다. 


자꾸만 자책하며 엄마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또 딸의 삶을 엄마의 삶처럼 함께 느끼고 싶어 하는 나를 발견한다. "엄마와 딸"은 꽤나 의미심장하게 해석되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같은 팔자, 닮은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엄마의 고통과 아빠의 무게를 함께 나누어 지고 싶은 딸이기도 하고, 서울에서 한참 벗어난 이 산골짜기 마을에서 홀로 삶을 꾸려가는 것이 좋은 사람이기도 하다. 

엄마를 멀리 떠나온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괴로운 마음을 어쩌지 못해 이 글을 쓰다 내린 나의 결론이다. 내가 있는 자리를 자꾸만 엄마와 연결 지어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다. 


다음번엔 좀 더 시골 이야기를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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