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해석과 존중하는 자세
“그건 작품문제가 아니라, 본인이 이해를 못하신 거 아닌가요?”
전공 수업 과제로 난해한 연극을 보게 됐다. 연극 관련 책자를 미리 보지 않았다면,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는지 한 번에 알아보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수업시간, ‘작품이 청중을 배려하지 않고 진행된 것 같다’라는 해석을 내놓은 동기의 발표를 듣고, 한 학우가 질문을 했다.
“그건 작품문제가 아니라, 본인이 이해를 못하신 거 아닌가요?”
질문의 요지는 즉, 작품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능력부족’을 탓하는 것이어서, 질문을 듣고 매우 화가 났다. 굉장히 무례한 발언이라고 생각했고(심지어 말투도 정중하지 않았다), 그 무례함 이면에는 ‘나는 쉬웠는데, 이걸 해석하는 게 어려워?’라는 깔보는 듯한 느낌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문화와 문학, 그리고 각종 예술작품은 딱 떨어지는 ‘답’이 존재하는 분야가 아니다. 과학이나 수학처럼 이미 정립되어 있는 이론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소통하며 섬세한 추상적인 감각을 다루는 영역이 예술이다. 그렇기에 더욱이 이 분야에는 ‘오만함’이 곧 ‘독’이다.
‘더’ 알고 ‘덜’알고를 떠나서, 예술 문화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해석의 높고 낮음도 없어야 한다. ‘평론가’가 남긴 평가와, ‘일반 대중’이 남긴 평가는 같은 저울에 놓여야 한다. 내가 칸에서 상을 받은 ‘홍상수’감독의 영화보다 ‘어벤져스’같은 상업영화를 좋아한다고, 내 수준이 낮아지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서 하현우씨는 본인이 음악분야에 있어서 ‘아이돌’ 보다 더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물론, 하현우씨는 ‘나는 가수다’, ‘복면가왕’등에서 증명되었듯이 무척 뛰어난 가수이다. 하지만, 그가 뛰어난 가수라는 사실이, 그의 해석에 더 우월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한 발언은 기존 아이돌 음악을 즐겁게 소비하던 소비층의 취향을, 모두 ‘질 낮은 취향’이라고 매도하는 것과 같다. 누가 그를 평가의 자리에 앉혔는가. 더 ‘잘’한다고, 더 ‘잘‘안다고 남을 멋대로 평가대에 올려 우열을 가리는 자세는 무례함의 극치이다.
수능 언어영역의 문학파트는 지속적으로 비판받아왔다. 수능은 5가지 선택지 중 하나의 정답만 골라내는 시험이지만, 정작 시나 소설을 쓴 저자는 이처럼 작품 속에 ‘정답인’ 해석만을 염두해 두고 집필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앙일보 토요인터뷰에서 최승호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작품은 프리즘과 같아서 눈 밝은 독자를 만나면 분광하며 스펙트럼을 일으킨다. 이런 해석은 노을을 보고 허무·열정의 이중성을 느끼는 사람에게 ‘빛의 산란’이
정답이라고 못 박는 꼴이다.”
“사람 사이의 대화나 교류가 일어나는 곳은 산과 산 사이의 골짜기다.
그런 골짜기에서 나오는 메아리가 중요하다.
‘나는 이 산꼭대기에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지만, 저쪽에도 또 나름의 산맥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면 산과 산 사이에 골짜기가 생겨난다.
오지선다 시험은 골짜기를, 골짜기 사이에서 나오는 메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해석에 대한 존중이 요구되는 문화예술영역에서, ‘오만한 해석’을 내어 놓는다는 건 수능처럼 정답을 찾고자 하는 ‘엘리트주의의 오만’이 아닐까? 오히려 이 분야에서는 ‘오만한 해석’이 아닌 ‘오만’가지의 해석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때는 당황해서 맞받아치지 못했지만, 이제는 무례한 질문을 한 학우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다.
“그건 해석문제가 아니라, 본인이 남의 해석을 이해 못하신 거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