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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ko Oct 21. 2020

바이닐 (LP)이라는 환상

정말 그렇게 환상적일까?

얼마 전 이사를 했다. 이전 집에서 고이고이 포장되어 구석 깊숙이 처박혀 있던 턴테이블이 몇 년 만에 빛을 보았다. 오랜만에 추억에 잠겨 좋아하는 바이닐 한 장을 골라서 플레이를 했다. 사용한 지 오래돼서 모터가 조금 힘들어하는 듯했으나 적당히 피치를 맞춰주니 그럭저럭 들어줄만했다. 아내가 이 광경을 보더니 깜짝 놀라 한마디 했다.


"우리 집에 턴테이블이 있었어?"


"어, 이거 10년도 넘은 거야... 결혼하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건데 몰랐어?"


"바이닐만 모으는 줄 알았지. 턴테이블을 보여준 적이 없잖아 ㅎㅎㅎ.”


"아~ 귀찮아서 안 들으니까. 마지막으로 들은 게 벌써 10년이 넘었나.”


아내는 집에 있는 턴테이블을 처음 본 것에 대한 놀라움 보다도 10년 동안 턴테이블의 존재에 대해 한 번도 얘기를 안 한 나의 성격에 대해 더 놀란 것 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결혼 한참 전부터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 위주로 바이닐도 모았고 턴테이블도 가지고 있지만 턴테이블에 바이닐을 올려놓고 음악을 듣는 모습을 아내가 처음 본 것이다.


시대가 변했다.


바이닐 음반 (LP)의 판매량이 CD를 넘어섰다고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이닐 판매량이 어마 무시하게 늘어났다기보다는 CD의 판매량이 대폭 줄어든 부분도 있다. 단순 비교해보면 그렇다.


카세트테이프가 음반 판매의 주요 자리를 꿰찬 이후, CD와 MP3가 주류를 이루던 때에도 이른바 고전 명반은 바이닐로 판매를 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새로 발매되는 팝이나 가요도 바이닐 음반으로 발매하고 있다. 대중적인 수요가 발생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여러 분석자료를 보자면, 온라인과 PC에서 가볍게 듣고 버리는 음악의 소비 방식이 변하여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음악을 소유한다는 개념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음악이 담긴 이 커다란 매체가 10대-20대에게 또 다른 만족과 재미를 주고 있는가 보다.


이는 분명히 음악 산업에 좋은 소식이다. 카세트테이프와 CD의 판매량이 어마어마하게 수익을 뒷받침하던 이전 세대의 황금기는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의 영광처럼 보였다. 다운로드와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소비하는 세대로 인해 음반 시장의 규모 축소라는 슬픈 전개는 비극으로 치닫는가 싶더니 이제는 박물관에서나 볼 줄 알았던 바이닐을 열렬히 구매하는 세대의 출현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 했다.


20세기 유물 바이닐


온라인에서는 어떤 흐름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리가 하는 얘기가 개인의 소비패턴에 쉽게 영향을 주는 시대에 살고 있다. 바이닐 또는 LP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검색해보면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바이닐을 소유하고 감상하는 행위를 열렬히 찬양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부분을 동의할 수 없다.


본격적인 불평에 앞서서 먼저 짚고 넘어가자면 나도 바이닐 세대는 아니다. 단순히 ‘그때가 좋았지.’ 하며 바이닐로 음악을 듣던 시절의 추억을 회상할 정도의 연령대는 아니다. 처음으로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취향이라는 것이 생기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음반시장은 카세트테이프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CD가 차세대 미디어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당시의 바이닐은 철저히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이런 시대를 살아온 나에게 바이닐로 음악을 듣는 행위에 동경 따위는 없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고 내가 속한 세대가 대부분 그랬다. 그러던 중 한때 유행하던 턴테이블리즘, 인스트루먼트 힙합, 바이닐로 구매할 수밖에 없는 레이브와 같은 장르에 빠지면서 테크닉스 (Technics) 사의 턴테이블을 구매하고 바이닐을 하나씩 사서 모으게 된다. 사랑하는 록 명반들도 가끔 눈에 띄면 샀다.


좀 더 부연설명을 하자면 20대에 바/클럽에서 아르바이트도 했는데 당시의 사장님은 어린 시절 다방 DJ를 했던 분이었고 업장에는 사장님이 가져다 놓은 수천 장의 바이닐 앨범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래서 손님이 적은 평일에는 평소 접하지 못했던 과거의 명반들을 쉽게 들어볼 수 있었다.


물론 그 당시 바이닐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CD로는 느낄 수 없는 사운드의 무게감이 있었고 뭔지 모르겠지만 고상함이 있었다.


감성은 거기까지, 취향은 바뀌었고 시대는 변했고 음악과 음향을 공부하며 교과서적인 이론을 적당히 습득하며 바이닐을 도대체 왜 사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현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되었다. 몇 가지 이유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Dean Drobot, Shutterstock


속시원히 얘기해보자


우선 너무 불편하다. 정말 불편해도 너무 불편하다. 한곡을 듣기 위해 거쳐야 할 단계가 너무 많다.

듣고 싶은 곡이 있으면 스트리밍 사이트나 유튜브를 통해 편하게 2초 만에 검색해서 듣고, 가만히 놔둬도 내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몇 시간이고 알아서 플레이를 해주는데 (심지어는 나의 취향을 헤아려주시고 내가 좋아할 것 같은 새로운 음악을 추천까지 해주신다.)


바이닐을 들을라 치면... 선반에서 해당 앨범을 찾고 꺼내서-적절한 면을 찾고-해당 곡의 순서를 읽어서-바늘까지 직접 놔줘야 한다. 또한 3-4곡 정도가 지나면 뒤집어 줘야 하는데 나의 행위가 음악을 듣기 위한 목적인지 음악을 틀기 위한 목적인지 가끔 헷갈린다. 그냥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싶다.


맨 위로 스크롤을 올려보라. 커버 사진에 여유로운 표정으로 누워 있는 저 남자는 20분마다 한 번씩 일어나서 판을 뒤집어 줘야 한다. 철저하게 콘셉트 사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


공간을 많이 차지한다.

얇은 면만 보자면 자리를 얼마나 차지하겠냐고 하겠지만 지름은 생각보다 커서 웬만한 책장엔 잘 들어가지도 않는다. 적절한 사이즈의 수납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단순히 MDF로 저렴하게 짜인 수납장이라면 미관상 좋지 않아서 방에 놓고 싶지 않고 분위기에 어울리는 장을 고르려고 치면 가격이 비싸거나 사이즈가 너무 크거나 이래저래 신경이 쓰인다.


관리가 힘들다. 이제부터가 진짜 중요하다.

바이닐은 주로 PVC (폴리 염화 비닐)라는 합성수지로 만들어지는데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기에 생각보다 민감하고 연약한 재질이다. 온도에 민감하고 외부의 충격에 약하다. 햇빛 잘 드는 예쁜 수납공간에 바이닐들을 적당히 기울여 세워놓았다가는 큰일 난다. 턴테이블의 암 (Arm)이 바이닐 위에서 파도를 타듯 춤을 출 것이고 이는 턴테이블에나 바이닐에나 좋지 않은 영향이 간다.


바이닐이 '우글우글'해지면 적당한 열과 압력을 가해서 편평하게 눌러주는 작업을 해줘야 하는데, 열기가 너무 과하면 소리가 담겨 있는 골이 눌려서 판을 아예 못쓰는 상황까지 발생한다. 물론 열과 압력이 너무 약하면 바이닐이 편평해지지 않는다.


소재의 특성상 정전기가 발생하여 먼지는 또 얼마나 들러붙는지... 먼지는 바이닐이나 바늘에도 좋지 않기 때문에 적당히 닦아줘야 하는데, 꺼내서 듣는 것도 귀찮은데 주기적으로 닦아주기까지 하면서 들어야 한다니 21세기에 할 짓이 아니다.


영화 새벽의 황당한 저주 (Shaun of the Dead)의 명장면


알아야 할 지식도 장비도 생각보다 많고 쉽지 않다.

이 부분은 일정 부분 이상의 투자와 시행착오를 겪다 보면 별일은 아니다. 하지만 현대 문명 생활을 누리고 살아온 세대에게 큰 장벽으로 다가올 것 같아서 단점으로 적어 보았다.


레트로를 찬양하면서 외관은 나무나 레자로 되어 있고 클래식한 여행용 캐리어나 '전축' 분위기가 나는 저렴한 턴테이블, 그중에서도 플레터 (바이닐을 올려놓고 회전하는 부분)가 12인치보다 작으면서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는 제품을 구매한다. 이러면 100% 망한다.


바이닐은 마찰에 약하다. 이런 제품류는 대부분 팔아먹기 위한 상술로써 외관만 신경 쓰고 내장은 아주 허술한 부품을 사용하기 때문에 모터나 암 (Arm), 바늘 또한 허술하고 적절한 빠르기와 무게를 지탱하지 못한다. 이는 바이닐이 필요 이상의 무게를 받으며 과도한 마모를 초래하여 바이닐이 급격하게 단명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저렴하고 괜찮은 턴테이블은 없을까. 주머니 사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오디오 기기 전문 회사에서 판매하는 제품 중에 10만 원대의 입문용 턴테이블도 그럭저럭 쓸만해 보인다. 다만 내장 스피커 같은 건 없다. 스피커가 별도로 필요하다. 10만 원대의 투자로 끝나지 않는다. 조금 더 투자를 해야만 한다.


기술적인 부분을 제외하고서라도 바이닐만의 사운드가 가지는 강점은 분명히 있다. 문제는 이 부분을 살려 주려면 최소 사양의 앰프와 스피커 또는 앰프가 탑재된 타입의 스피커가 있어야 할 텐데... PC에 연결되어 있던 저렴한 스피커나 아니면 저렴한 턴테이블에 내장되어 있는 스피커에서 FM 라디오 수준의 음질로 그냥 감상하겠다면, 바이닐로 음악을 ‘감상’ 하는 행위의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외에도 톤암을 세팅하는 방법이며, 바늘과 카트리지의 성능, 전자동의 유무, 라인 출력이 없는 턴테이블이라면 전용 포노 (Phono) 앰프까지 구매하는 등 고려할 내용은 상당히 많다. 이쪽 분야는 전문가 분들이 상세하게 기고해놓은 글이 많으니 따로 검색해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리...

이건 순전히 개인 취향이 반영되어 있으므로 굳이 참고하지는 않아도 된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오래전 바이닐이 주류이던 시절에는 당연한 얘기이겠지만 음반을 만드는 과정이 모두 아날로그였다. 기술의 발전 함에 따라 이 과정들이 서서히 디지털로 대체되었고 지금은 대부분의 과정을 디지털로만 진행한다.


특히 미디어에 담기 전 마스터링이라는 과정을 필수로 거치는데, 디지털로 마스터링을 하고 바이닐로 찍어낸 음반은 글쎄... 영상으로 비유한다면 디지털 UHD로 촬영하고 아날로그 VHS 비디오테이프로 판매하는 형식이랄까. 높은 해상도의 사운드를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영상은 4K를 넘어 8K로 가는 세상에 왜 음악은 아직도 MP3를 듣고 발전하는 것도 모자라서 시대를 역행을 하는지 이 부분이 난센스로 느껴진다. 다이내믹이 살아나고 따듯한 느낌이 난다고 하는 바이닐 특유의 그 소리는 적어도 나에게는 SD급 화질의 영상을 보는 듯한 일부러 만들어낸 멍청하고 뭉뚱그려진 소리로 들린다.


다만 바이닐이 주류이던 시절에 발매 한 음반들은 바이닐로 듣는 것이 더 좋게 느껴지기도 한다. 애초에 스튜디오에서 프로세싱을 거치는 과정에서 바이닐을 염두에 두고 바이닐의 특성에 맞는 프로세싱을 거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가끔 70-80년대에 발매한 원판을 직접 들을 일이 있었는데 이때의 음악은 오히려 CD나 WAV로 들었을 때의 느낌보다 훨씬 생동감 있고 리얼하게 다가왔다.


예를 들어 바이닐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장르를 들을 때는 마음이 혹할 때도 있지만, 그냥 대가의 셀렉션을 듣는 것으로 만족.

Gilles Peterson Boiler Room Los Angeles DJ Set


새로운 희망

음악을 좋아하고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음반을 소유하고 감상하는 행위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전자책이 상용화되어도 종이책을 읽는 경험을 대체할 수 없고 태블릿과 컴퓨터가 발전이 되어도 만년필이 주는 특별함을 대체할 수 없듯이 말이다.


하지만 영상 매체의 발전 (AR/VR/MR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쳐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오디오 매체 기술 상용화는 조금 아쉽다. SACD나 DSD와 같은 기술들은 좀 더 대중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새로운 기술로 발전하여 한층 더 편리하고 놀라운 경험을 즐길 수 있는 시대가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


커버 이미지 ©corepics VOF,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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