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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경 Jul 16. 2021

'학력 차별'은 정당한 차별일까

논란의 차별금지법에 대하여: 평등과 차별의 딜레마


제목을 쓰고 보니 제법 웃기다.

'학력 차별은 정당한 차별일까'라니.

과연 차별은 정당성이라는 단어가 포함될 수 있는 개념일까?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솔직하게 고백할 것이 하나 있다. 나는 블라인드 채용을 싫어한다. 그것도 꽤 많이.

 나는 수능을 세 번이나 본 끝에 명문대 축에 속하는 대학교 진학에 성공했다. 고등학생 때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많이 들었던 말은 '대학 간판이 중요하다'였다. 그때는 대학이 세상의 전부인 것 같았고 그래서 더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명문대 진학에 성공한 후에는 뭔가 특별하고 그림 같은 미래가 펼쳐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대학에 와 보니 이제 와서 갑자기 학교 이름을 보지 않겠다고 말을 바꾼다. 지난 내 시간과 노력은 무엇이었나. 엄청난 상실감과 무력함이 나를 덮쳤다.


 블라인드 채용을 통해 외모, 나이, 성별 등에 구애받지 않고 편견 없이 지원자를 판단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한다. 사람은 생각보다 감정적인 동물이다. 이성적이고 냉정한 판단을 유지하려고 노력해도 무의식적으로 외적인 부분에 시선이 간다. 때문에 어떤 이는 외모가 면접관 마음에 안 들어서, 어떤 이는 나이가 많아서, 혹은 특정 성별이라는 이유만으로 기회를 박탈당한다. 이 같은 차별은 제거되어야 한다.




 그런데 차별의 대상이 '학력'이라면 어떨까?
 학력은 개인의 선택과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데?




 차별금지법에 대한 논란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지난해,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차별금지법'을 대표 발의했다. 차별금지법이란 '합리적 이유 없이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성적 지향성,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인종, 피부색, 언어 등을 이유로 고용, 교육기관의 교육 및 직업훈련 등에서 차별을 받지 않도록 하는 내용의 법률(한경 경제용어사전 발췌)'을 말한다.


 그런데 교육부가 '차별 금지 대상에서 학력을 제외해야 한다. 학력은 합리적 차별의 대상이다.'라는 의견을 국회에 제출했다. 교육부가 언급한 개념의 학력 안에는 학벌도 포함된다.



 ⑴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교육 성취 정도와 수준이 달라질 수 있고,

 ⑵ 학력을 대신해 개인의 역량을 평가할 구체적 기준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본디 문재인 정부는 ‘학력·학벌주의 관행 철폐’라는 국정 철학을 내세워왔다. 이와 발맞춰 취업 시장에서는 블라인드 채용이 점차 확대되었고 하나의 문화처럼 자리 잡았다. '사람마다 출발선이 다르다'며 수저론 같은 담론이 유행이었기에, 해당 정책은 사회적으로도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제기된 교육부의 의견은 현 정부 철학, 사회적 여론 모두와 불일치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교육부의 주장을 시대역행적이라며 맹렬히 비판했다. 부정적인 여론이 거세지자 교육부는 '학력은 차별 대상이 될 수 없다'며 급하게 말을 바꿨다.




01) 왜 교육부는 학력 차별을 옹호했을까


 사실 이는 대답하기 쉬운 질문이다. 언뜻 생각해봐도 교육부의 입장을 대표하는 고위 직책의 대부분은 고학력일 가능성이 높다. 좋은 학벌을 취득하기 위해 노력했고 줄곧 그 혜택을 노려온 이들에게 '학력으로 차별하면 안 됩니다'라고 말해보자. 과연 몇 명이나 고개를 끄덕일까.


 해당 논란을 접한 후, 학력 차별에 대한 주변 친구들의 생각을 물어본 적이 있다. 친구들은 대부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반응이었다. '학력으로 차별받는 게 싫으면 열심히 공부해야지. 우리도 열심히 공부해서 여기에 왔는데. 얼마든지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걸 안 하면서 동등한 대우를 받길 원하는 건 말이 안 돼.' 몇 명에게 물어봐도 반응은 비슷했다. 교육부에도 고학력의 인재들이 다수 분포되어있을 것이다. 그들이 학력 평등에 질색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02) 그럼에도 교육부가 잘못한 것


 그럼에도 나는 교육부의 주장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들은 '교육부'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적으로 학력 차별을 긍정하는 마음까지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나라의 교육 정책을 담당하고 책임지는 대표 집단의 이름을 걸고 '학력 차별은 정당하다!'고 외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대한민국의 일부 청소년들은 저런 생각을 갖고 있는 교육부의 정책 하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먹고 상처 받았을 것이다. 적어도 교육부로서는 학력 차별을 정당화하면 안 됐다.




03) 과연 학벌 수준은 개인의 노력에 달린 것일까


 뉴스에서는 SKY 대학에 진학 중인 학생들 중 소득 분위가 9, 10 분위인 가정의 자녀들이 대부분이라는 통계자료가 자주 보인다. 그렇다면 교육부의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교육 수준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주장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평등한 교육 기회를 위해 EBS 교재의 수능 연계 비중을 늘리고 무료 인터넷 강의를 제공하면서 재정 수준이 열악해도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다. 우리 집만 하더라도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부유하지도 않았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 3년 내내 어떠한 학원도 다녀본 적이 없다. 재수, 삼수 때도 재수 학원에 다니지 않고 지역 도서관에서 독학으로 준비했으며, 세 번째 입시 때는 부모님 몰래 수능을 준비했기에 변변찮은 내 용돈으로 모든 교재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부족하다는 느낌은 많이 들지 않았다.


 내가 보았던 글 중에서는 '돈이 없어 주변에 풀다 남은 교재들을 수거해서 공부해 명문대 진학에 성공했다'는 에세이도 있었다. 그러나 저 에세이는 과거의 것이었고, 요즘은 인터넷만 접속해도 수많은 공부 자료가 업로드되어있으며 EBS 정책 때문에 재정 부담이 한 층 더 줄었다. 이전에도 노력만 하면 어떻게든 될 수 있었던 것이 요즘은 좀 더 수월해진 것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 사교육 시장은 지칠 줄을 모르고 팽창하고 있다. 누군가는 고생고생을 하면서 EBS 교재나 간신히 들여다보며 죽을 듯 노력해야 겨우 명문대 문턱을 밟아보는데, 누구는 어렸을 때부터 질 좋은 사교육을 받으며 당연하다는 듯 편하게 명문대에 들어온다.

 

 그래서 해당 교육부 주장에 대해 나는 반은 참이고, 반은 거짓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집안 환경이 어떻든, 재정 수준이 어떻든 노력만 한다면 공부의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얼마나 수월했는지, 노력 대비 아웃풋의 양이 얼마인 지에는 확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교육부의 말대로 아무튼 노력을 하면 학벌을 쟁취할 수는 있다…! 대신 더 많이 고생할 각오는 해야 한다.





04) 평등과 차별 속 딜레마 : 평등의 적정선은 어디까지일까


 결국 내가 그를 찬성하든 반대하든 간에, 세상은 점차 평등으로 나아갈 것이다. 따라서 해당 주제에 대해 '나는 학력 차별에 찬성한다' 혹은 '학력 차별에 반대한다'는 단순한 의견 제기를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는 더 심도 있는 고민을 해보기로 했다.


 내가 해당 이슈를 접하고 처음에 든 생각은 상실감과 무력함, 그리고 당혹감이었다. 이러한 감정의 폭풍이 한 차례 내 머리를 휩쓴 다음 남은 것은 '의아함'이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에서는 자신이 보유한 능력에 따라 자본이 주어지고, 자본에 의해 권력과 힘이 결정된다. 그리고 학력은 지금까지 능력의 범주 중 하나로 인정받아왔다. 그런데 이번 논란의 주된 여론은 '학력, 학벌'을 고려할 때 차등을 두자는 것도 아닌, 완전히 능력의 범주 안에서 제외하자는 것이다. 마치 칼 마르크스가 주장한 공산주의 사회를 희망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자본주의 안에서 공산주의의 가치를 추구하는 모순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학력 및 학벌 차별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다음은 나 혼자 머릿속으로 구상해 본 시나리오이다.


 우선 아무도 열심히 공부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소수의 인재들은 사회 분위기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자기 계발에 매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과거와 다르게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해 있고, 그 안에 정보의 바다라고 불릴 만큼 많은 콘텐츠들이 있다. 주변 압박 없이도 자발적으로 자기 계발에 매진하기에 요즘 세상에는 너무 재미있는 것이 많다. 학력과 학벌에 차등을 두지 않으므로 열심히 공부할 유인도 없다. 전국적으로 학업 성취도 수준이 하락하면서 우리나라는 점차 기술력을 잃어가고 세계 시장에서 주도권을 박탈한다. 그나마 있던 소수의 인재들은 더 나은 수준의 국가로 떠나 대규모의 인재 유출이 발생한다. 개인의 독특한 능력과 역량, 지식수준을 강조하는 세계 시장 내에서 우리나라는 역방향의 행보를 보이며 서서히 추락한다…….


 인간의 행동 동기는 보상과 처벌에 결정된다. 공부에 보상도, 처벌도 없다면 공부에 관심을 가질 이가 얼마나 될지 생각해보라. '그래도 다들 열심히 할 것이다'라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볼 때 학력 차별은 필요악인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내가 고학력, 고학벌이기에 학력 차별은 존재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님을 밝힌다. 내가 블라인드 채용에 거부감을 갖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보상 심리의 영역일 뿐. 모두가 평등한 대우를 받고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유토피아가 있다면 나도 기꺼이 동참하겠다.

 그러나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능력에 차등을 두지 않으면 능력 개발을 위해 힘쓸 유인이 급격히 감소한다. 이는 세계 경쟁력으로 연결되어 우리나라 경제는 악화되고, 결국 모두를 위했던 평등은 모두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공산주의가 이론 상으로는 완벽했지만 현실적으로는 실패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평등과 차별의 딜레마다. 모든 이들이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이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어디까지 평등의 기준선을 두어야 할까? 평등의 적정선은 대체 어디까지란 말인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





05) 내가 생각하는 차선책


 지금까지 나의 생각을 종합적으로 정리해보았을 때, 세계 경쟁력 유지를 위해 학력 및 학벌 유지는 어쩔 수 없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학력 차별을 제거하려면


 ⑴ 개인의 역량을 평가할 수 있는 또 다른 객관적, 구체적인 기준이 마련되어야 하고

 ⑵ 그 기준에 대한 가능성이 모든 이들에게 동등하게 열려있어야 하며

 ⑶ 투명성이 보장되어야 하고

 ⑷ 해당 기준을 성취할 유인이 명확히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해당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또 다른 지표를 찾으려면 추가적인 시간, 비용 부담이 발생한다. 더 최악인 것은, 해당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기준이 실존하는지 여부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현재 시점에서의 차선책은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걷어 최소 수혜자에게 분배하는 방식으로 완전하지는 않지만 최대한 평등한 교육 환경 구축에 힘쓰는 것'이다. 부자들의 반발이 심할 것은 당연하지만 아직까지는 이게 최선의 대안이라 생각된다……


 '또 다른 좋은 대안이 있다!'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댓글로 의견을 공유해주시면 좋겠다.



 언젠가 모든 사람들이 사적인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평등하게 자신의 역량을 펼치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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