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일까. 지금 생각을 하고 의식을 이루고 있는 것이 나일까. 다른 이들이 보는 나의 모습이 나일까. 일을 하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있을 때의 모습이 진정한 내 자신이 드러나는 것일까. 시시 때때로 나의 생각과 모습이 바뀌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러한 나의 수많은 의식들 중 나를 대표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디부터 어디 까지를 나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찾을 수 있을까. 진리가 존재하는 것일까.
공간에 들어서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지하로 걸어 내려가 장막을 한 번, 두 번 걷고 도달한 곳은 하얀 세상이었다. 나를 덮고 있는 가면을 걷어내고 의식의 밑바닥으로 내려간 듯 어둡고도 환한 진실의 공간. 정해진 자리가 없는 곳에서 어디로 가야할 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알지 못한 채로 한참을 서성이고 헤맸다. 어느 한 구석에 쭈그려 앉았지만 이곳이 나의 자리인지 알지 못했다.
실낱같은 조명마저 잦아들고 의식이 혼미한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존재들이 빛을 내며 나타난다. 빛이 정신없이 움직인다. 귀를 때리는 음악과 사납게 움직이는 것들이 나를 어지럽게 한다. 날뛰는 것들이 내 속의 욕망일까 감추어 둔 폭력일까. 시시각각 움직이는 빛은 내가 보는 세계일까 남들의 시선일까. 너무나 많은 움직임과 생각으로 힘들어질 즈음, 지쳐 스러졌다. 다른 차원에 들어섰다. 내가 나타난다. 거울을 덮고 있던 하얀 천을 벗겨낸다. 꽁꽁 싸매고 있던 마음을 벗겨내고 자신을 마주한다. 자세히 탐구한다. 키를 훌쩍 넘는 큰 거울을 지고, 자신을 돌아보는 고통의 무게를 지탱하며 세상으로 나아간다. 의식의 한가운데에 도착한다. 진실의 눈으로 다른 이들을, 다른 방향을, 다른 세상을 비추어 보았다. 갑자기 마음 속에 존재하는 또다른 자아가 나타났다. 두 자아는 어우러져 함께하기도, 비틀어지며 위태로운 조화를 이룬다. 일순간 충돌이 멎고 마찰이 잦아든다. 꼭 껴안은 채 멈춘다. 새로 만난 내 모습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새로운 발견의 기쁨과 두려움의 불이 타올랐다. 불이 사그라들고 모두가 잠에 빠져들었다. 어둠과 함께 즐거움과 괴로움과 고통과 미지가 가득 찬 세상이 끝나는 듯했다.
타고 남은 것들이 내뿜는 죽음의 향기가 숨을 막히게 했다. 그곳의 한복판에 새로운 생명이 나타났다. 세상과 현실의 주름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생명이었다. 잊고 싶었던, 덮으려 했던, 피하려 했던 현실을 대면하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자아들이 진실을 마주친 것 같아 괴로웠다. 이 고통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느 순간 깨달음이 생겼다. 진실을 마주한 것이 두렵고도 기뻤다. 새로운 희망이 마음 속에 피어난 것만 같았다. 공연은 제목과 같이 예기치 않게 끝났다.
공연 내내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다음에 전개될 이야기와 내용을 절대로 알아차릴 수 없었다. 무거운 분위기와 알 수 없는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어렵지 않았다. 격정이 최고조에 달하는 때가 여럿 있었지만 긴장을 풀어내는 장면과 요소가 곳곳에 배치되어 나를 편안하게 했다. 장면을, 무용수를, 소품을, 내용을 완벽하게 받아들이지 못해도 괜찮다고 속삭이는 듯했다. 공연 중 가끔, 알 수 없이 가슴이 떨렸다. 마음의 전율인 듯하다. 공연장에서 내가 존중 받고 이해 받아본 기억이 없었다. 지금까지 많은 공연을 보았지만 항상 저건 다른 세계의 이야기라는, 내가 속한 곳이 아니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공연이 되고, 공연이 나를 풀어서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것에서 온 감동이었을까.
현대무용은 난해하다. 난해함이 현대무용이 주는 가장 큰 매력이다. 정해지지 않은 답과 의미를 추리하며, 순간 순간을 지나는 감정의 가닥을 헤며 머릿속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즐거움을 느낀다. 때론 상식과 질서를 파괴하는 기술과 무대 장치로 당황하거나 충격에 휩싸이기도 한다. 이러한 충격은 관객들의 생각을 일깨우고 편견을 해소하여 마음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긍정적인 효과를 일게 한다.
‘예기치 않게 종료되었습니다’는 새로운 충격을 선사했다. 통상적인 공연의 구조는 무대와 객석이 나뉘어 존재한다. 무대에 보여지고 들리는 것을 관객은 수동적으로 향유한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메세지를, 감정을, 속내를 전달하기 위하여 많은 시도를 이어왔다. 관객에게 호응을 유도하고 다양한 소품을 활용하거나, 독특한 음향이나 향기, 촉각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관객을 무대로 올리거나, 때로는 객석에서 연기를 하는 것과 같은 시도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담장을 넘어 훔쳐보는 것과 같은 한계가 있었다. 객석과 무대, 그리고 예술가와 관객이라는 경계는 언제나 존재했고 그것을 허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번 공연은 그 경계선을 허물어버렸다고 생각한다. 공연이 펼쳐지는 공간에서 예술가와 제작자, 관객 모두는 객석과 무대의 구분이 완전히 사라진 채로 수평적으로 존재했다. 서로의 물리적인 경계를 해소하여 공연의 몰입도를 그 어떤 공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시켰다. 관객은 공연을 향유하는 주체에서 그치지 않는다. 직접 공연 내용에 참여하고 움직이고 말을 하며 공연을 만들어내는 지위에 올라섰다. 지금껏 상상으로 그치거나 사념으로 지나갔던 공연의 구조가 현실이 되어 눈앞에서 펼쳐졌고 그것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그 어떤 공연에서도 없었던 종류의 감동을 받을 수 있었다. 관객과 예술가 사이에 있었던 물리적 경계와 추상적 경계까지 걷힌 곳에서 서로의 소통을 넘어 깊게 교감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생각했던, 당연히 여겨왔던 공연의 구조가 변하기 시작한 첫 모습을 마주한 것만 같다. 이 변화의 다음 모습이 벌써 기다려진다.
글 I 월랑
공연 '예기치 않게 종료되었습니다'
안무/연출 류장현
퍼포머 김난수, 문현지, 성안영, 송재윤
뮤지션 최태현
드라마투르기 염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