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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랑 Jan 19. 2020

리뷰_연극 '체액', 2019 창작산실

물은 예로부터 감정이나 사랑을 의미하는 요소로 여겨졌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미신으로 또는 심심풀이 땅콩으로 여겨질 수 있는 타로카드도 마찬가지이다. 타로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다양한 기호와 사상이 담겨있다. 그중, 물을 상징하는 컵 카드는 사랑, 우정, 감정의 속성을 가진다. 연인 간의 미래를 점칠 때 컵 카드가 나오면 사랑이 가득한 미래를 기대해볼 수 있다. 이번 공연, '체액'은 타로카드의 물이 의미하듯 마음에 대한 내용을 담은 작품이었다.


공연장에 들어서는 순간, 주인공의 머릿속으로 들어선 듯했다. 어둡고 푸른빛과 함께 때때로 울리는 몽환적인 멜로디는 우울했고 습한 기운이 나를 잠식했다. 공연이 시작되며 잠들었던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나고 힘없이 침강한 기억의 조각들이 서서히 부유하는 것을 느꼈다.


여자는 남자와의 관계에서 더 이상 어느 것도 느낄 수 없다. 여자의 불감증은 그저 성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여자의 마른 영혼은 외부의 어떤 감정도, 자극도 느낄 수 없다. 어디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가난한 환경일까 불우했던 어린 시절이었을까. 여자는 남자를 만나고 사랑을 하지만 절대로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자신을 숨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어.’ 때로는 경찰과 도둑, 때로는 신부와 신도의 고해성사. 여자는 메말라가는 몸을, 감정이 사라지는 영혼을 필사적으로 감춘다. 가면을 쓴다. 다한증을 가진 남자는 그런 여자를 적시기 위해 노력한다. 필사적으로 다가간다. 하지만 메말라가는 여자의 속은 남자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여자를 말라붙게 한 것은 단편적인 사람과 사건이 아니라 현실 세계 자체였다. 가족의 부재, 수많은 인형과 장난감이 가득한 친구에 비해 장난감은커녕 쓰레기 조각도 없는 나의 주머니. 생리대의 불쾌함, 훔친 탐폰. 자비에 대한 불쌍함을 요구하는 세상. 켜켜이 쌓인 과거의 무게에 짓이겨진 여자의 영혼은 남자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붙이고 이어낼 수 없다. ‘당신이 원하는 모습은 무엇이든 될 수 있어, 그런데 너는 왜 나의 한 가지 모습을 원하는 거야?’ 여자는 남자를 뿌리치며 울부짖는다. 절규는 공연을 관통하며 여자의 조각난 영혼들이 외치는 메아리로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여자는 젊은 시절, 마트에서 일했다. 이름이 잘못 적힌 이름표를 바꿔달라고 요구하지만 항상 무시당한다. 그것은 절대로 중요하지 않다. 나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고객님이 중요할 뿐. 무의미한 욕구를 채우는 것이 중요할 뿐. 마트 직원 따위는 공허한 마음에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커다란 카트에 물건을 담는 것을 돕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담는 물건이 유기농인지 친환경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무언가 속을 채운다는 만족감이 중요할 뿐. 여자는 감정이 메말라간다. 아니, 감정을 냉동실에 놓고 일한다. 마치 냉동만두처럼, 꽁꽁 얼어붙은 채로.


과거와 현재의 여자들, 또는 여자의 다양한 자아들은 얼어붙은 감정을 다시 살리려 노력한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너무 오랫동안 냉동실에 얼린 감정은 마치 오래되어 말라비틀어진 냉동만두같이 파삭하다. 돌이키기 쉽지 않다. 하지만 다시 숨을 불어넣는다. 잘 되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다시 감싸 안는다.


100분이라는 시간 속에 너무나 많은 상징과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매 순간 느낀 감정과 떠오른 것들, 현대 사회의 문제점들이 너무도 많아 헤어낼 수 없었다. 글에 무대의 모든 것을 풀어내지 못하는 나의 비루한 글솜씨에 우울함을 느꼈다. 좋지 못한 건강으로 인하여 내가 느끼는 건조함과 얼어붙은 감정이 공연 내용과 함께 되살아났다. 때로는 가슴이 시리고 가끔 먹먹했다. 저렴한 희망을 불어넣는 해피엔딩이나 한없는 우울함을 부르는 새드엔딩이 아닌 플랫 한 결말이라는 점이 끔찍하게 좋았다. 알 수 없는 미래와 고통 속에서 얼어붙은 영혼을 살아 숨 쉬게 하려는 힘없는 움직임. 가슴이 저릴 만큼 사실적인 끝맺음이었다. 담백했다.


여느 연극과 같이 한 공간에서 이야기가 동시적으로 펼쳐지는 구조였다. 하지만 장면이 바뀌며 분위기가 크게 전환되는 대부분의 작품에 비하여 이번 작품은 스토리가 끊김 없이 유려하게 이어졌다. 한 순간도 유리되지 않고 모든 순간이 꽉 차 있었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화려함이 지나친 옷이 그러하듯 양념이 센 음식이 그러하듯 공연이 담은 의미가 너무 많은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한 편에 이토록 깔끔하게 담아낸 것은 경이로웠지만 지나치게 많은 상념들로 머리가 어지러웠고 그것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것들이기에 고통스러웠다. 덧붙여 최근 다양한 사회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한쪽의 입장에 지나치게 치우친 것이 아닌지 다소 염려스럽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를 바라보았다. 현실에 난도질당한 나의 가슴팍이 너덜거렸다. 시간의 길바닥에 영혼이 흘린 체액이 흥건했다. 지금껏 나는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얼마나 건조했을까. 메마른 영혼이 다시 촉촉해질 수 있을까.




글 I 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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