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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랑 Sep 14. 2021

죄와 벌 #1

무식한 죄

_무식한 죄

수도권 4년제 사립 대학교 인문학 전공.


나는 소위 취업시장에서 사람 취급받지 못하는 스펙을 가지고 있다. 같은 굴레가 씌워진 동문 중 몇몇은 더 나은 세상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나를 포함한 몇몇은 무식한 죄로 이 무간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다. 누군가는 즐겁게만 보낸 대학생활에 대한 합당한 죗값을 치르는 거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대학생활은 결코 즐겁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오랜 기간 병과 싸우며 만신창이가 된 몸을 끌고 들어간 대학교는 나의 전공을 두 번 없애는 것으로 정신마저 무너뜨렸다.



시작은 신입생의 기분에 한껏 들떠있던 4월이었다. 셋째 주 주말. 어디선가 날아든 폭로가 동기들의 단톡 방을 뒤집어놓았다. 대학교 재단 이사회에서 나의 학과를 폐지시킨다는 논의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는, 어문학 전공인 우리 학과의 정원을 경영학부로 흡수 합병시킨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너희 목적은 취업이고 취업하려면 경영학을 전공하는 것이 더 수월하다, 이미 복수 전공하는 인원도 많으니 전공을 바꾸어도 문제가 없지 않냐는 논리였다. 학생회에서는 다급하게 학생총회를 개최하고, 몇 안 되는 교수님들은 강의시간마다 싸워야 된다며 부당함을 토로했다. 사회경험이 없는 미숙하고 어린 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제대로 된 결론은 나올 수 없었다. 선배들은 총장의 거만함에, 경영학부 교수들의 간사함에, 공대 교수들의 무관심에, 자신들의 무식함에 이리저리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전공 교수들은 재단과 학교에 밉보여 자신의 밥그릇을 빼앗기는 것이 두려워하며 학생들이 나서야 한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나이 많은 신입생으로서 동기들에게 최대한 불이익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총장과 교수들과의 면담 자리에 빠짐없이 참석했지만 아무도 신입생들의 입장을 살펴주지 않는 것에 절망했다.



전체를 살리려면 꼬리를 잘라야지



총장과의 면담 자리에서 총장은 나의, 아니 갓 입학한 신입생들의 면전에 너희 학과가 이익을 내지 못하니 학교에서 없앨 수밖에 없다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15억짜리 교육부 예산을 따와야 하니 너희 등록금 3억을 포기하는 게 맞지 않냐, 전체를 살리려면 꼬리를 잘라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전공 폐지에 대한 보상안 따위는 없었다. 그들에게 우리는 빨리 치워야 할 쓰레기 같은 존재였다. 어른에 대한 환상이 완전히 깨지고 대학교수라는 단어에 어린 모든 빛이 사라지며 이공계 출신자들에 대한 혐오가 생겼다. 공대 교수 출신 총장의 강경한 입장에 교내에서 주류를 이루는 공대 교수들은 시녀처럼 내시처럼 총장의 말에 기었고 경영학부 교수들은 쥐를 쫓는 족제비처럼 우리를 노렸다.



여러 차례의 회의와 면담이 반복되던 중 선배들이 모인 비상대책위원회는 학과 학생총회에서 전체 투표를 통해 앞으로의 노선을 결정하기로 했다. 선배들은 이미 학교의 방침인 이상 거스를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심지어 누군가는 학교에 협조해서 최대한의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하자며 찬성을 독려했다. 결국 투표는 학교의 방침에 협조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경영학부에 합병되는 것은 찬성하되 별도 트랙을 구성해 달라고 학교에 요구한다고 했다.



내가 이 거지 같은 학교를 선택한 것 외에 유일하게 후회하는 것은 바로 이 말도 안 되는 총회와 투표를 막지 못한 것이다. 한 번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지레 겁먹고 도망치는 선배들을 보며 일제강점기의 친일파가 오버랩되었다. 학내 유일한 인문학 전공으로서 4년제 종합대학이라는 다양성과 그 당위를 주장했더라면, 뜻을 모아서 싸웠더라면 학과가 살아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좀 더 현실적으로 최대한 저항을 해야 우리가 당한 피해에 대해 합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학점을 이수하고 졸업에 다다른 선배들은 그대로 졸업하면 그만이겠지만, 하지만, 우리들은? 이제 막 대학 교육과정을 이수하기 시작한 우리들은? 그리고 내가 선택한 전공을 끝까지 마치고 싶은 나의 의사는? 학생 수가 줄어들면 전공필수 과목들도 폐강될 텐데. 사람들이 어쩌면 이렇게 이기적일 수 있지? 경영학과로의 전과는 아무도 막지 않는데 남아있으려는 학생들과 신입생에게까지 피해를 주면서 학교에 숙이는 이유를 지금도 도저히 알 수 없다. 이기적이었던 걸까 멍청했던 것일까.



그 투표날 이후, 선배라는 것들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인 두껍을 뒤집어쓴 탐욕에 눈먼 이기주의자들. 몇몇 선배들이 경영학부로의 흡수 이후 신설될 트랙을 직접 설계해서 건의한다고 했다. 일개 학생들이 학부 커리큘럼을 짜고 있었다. 학과 교수들은 모두 손 놓고 구경만 했다. 가끔 강의 중에 질질 짜면서 감성팔이만 했을 뿐.



첫 기말고사가 끝나갈 무렵 학과 교수 한 명이 경영학부로 소속을 바꾸었다. 그 교수는 성적 상위권인 학생들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하며 자신이 뒤를 잘 봐줄 테니 학교 방침에 협조하고 자신을 따라 경영학부로 가자고 했다는 증언들이 튀어나왔다. 지금도 그 교수는 언어학 학위를 가진 채로 경영학부 교수 명단에 올라 있다.



이 즈음부터 포기했던 것 같다. 총회 투표의 충격과 부모님의 건강 문제, 학업과 일의 병행으로 나에게는 더 이상 소비할 힘이 없었다. 그저 동기들을 위해 정보수집과 전달에 집중했다. 이것이 내가 공부를 더 열심히 하지 못한, 소위 SKY로 통칭되는 학교들을 가지 못한, 학교의 시스템과 커리큘럼에 무지한, 정부의 교육 정책을 파악하지 못한, 무식한 죄로 인해 받은 벌의 시작이었다.




 글은 허구가 아니라 모두 본인의 체험과 녹취, 서면 기록을 바탕으로  사실입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쓴 글이고 모두 세 편으로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쓰는 순간순간 온 몸에 고통이 퍼져 쉬이 써지지가 않았어요. 다음 편을 언제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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