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세 시간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나의 몸은 비가 올 때면, 장마가 올 때면, 습하고 더울 때면 와르르 무너진다. 아무리 맑은 날이라도 기상청에서 비 올 확률 0%라고 해도 다음 날 내리는 비를, 몇 시간 후 내릴 비를 나는 몸으로 안다. 오늘도 낮에는 햇빛이 눈부셨지만 지금은 어설프게 낀 구름에 애매한 빗발이 날린다. 지난밤 몸을 뒤척이며 억지로 잠에 든 동안 겨우 덮고 기워낸 상처들이 꽃망울이 터지듯 껍데기가 열리고 속에 들어있는 것들을 뿜어낸다. 멀쩡한 부분도 빨갛게 돋아 뒤집어지고 따가움과 가려움과 근육통이 섞여 이 세계의 것이 아닌 통증을 만들어낸다.
한창 전투를 벌이던 중,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다. 일 때문에 온 전화인가? 아쉬우면 다시 걸겠지. 아니다 혹시 모르니.. 혹시 모르니까. 전화를 걸어본다. ‘임상실험 일정이 확정되어서요..’ 한 달째 잊고 있었다. 당연히 안될 거야, 아마 안 되겠지, 아니 49%는 안되기를 바랐다. 논문 한 권 두께의 경고문, 부작용, 금지 리스트는 생각할수록 나 스스로를 죽을 때까지 목줄에 묶인 시골의 개나 밤늦게까지 야자를 해야 하는 고등학생, 징역형 선고를 받은 피고인으로 만들어버린다. 사인을 하는 순간 거대 외국계 제약회사의 실험쥐가 되어버리겠지. 하지만 치즈는 너무 달콤하다. 5년 간의 치료약 지원, 실험 참여비 지급, 보습제 지원, 돈, 돈, 돈. 씨발.
약이 있다. 하나는 5년 전에 나온 주사. 하나는 작년에 나온 먹는 약. 물론 치료제는 아니다. 몸에 약을 집어넣는 동안 증상이 올라오지 않게 하는 약이다. 마약이랑 다를 게 뭐가 있나 싶다. 주사는 한 달에 150만 원. 먹는 약은 70만 원. 먹는 약이 나온 후 두 거대 제약회사는 경쟁이 붙었다. 먹는 약 대신 주사를 맞으면 10만 원을 깎아주겠단다. 그러자 먹는 약은 5만 원 할인 행사를 하고 있다. 개새끼들. 그래도 주사가 더 안정적이다. 먹는 약은 만성 소화불량이 생길 것이다. 다른 부작용도 있을 것이다. 그래, 비싼 게 이유가 있겠지.
일본에서 살고 싶다. 거기서는 누구든지 아프기만 하면 150만 원이든 70만 원이든 의료보험 적용이 된다. 한국은 니가 얼마나 아픈지 점수를 내서 정말 죽을 정도로 아픈 게 증명되면 하는 거 봐서 5년 동안만 보험혜택을 한번 줘본다고 한다. 10년 전, 또는 초등학생 때처럼 지금 건강이 나빴다면, 5년이고 10년이고 건강보험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억지로 더 악화시키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아픈 것보다 그것을 실행할 힘이 없다. 무엇보다 아픈 건 아픈 거고 힘든 건 힘든 거다. 자해를 해서 스스로 만들어낸 고통을 견디며 무언가를 얻어낸다는 것은 사람이 아닌 존재라서 가능한 것이다.
팔의 스크래치에 피가 맺힌다. 묵직하면서도 선명한 피 냄새가 달콤하다. 비 올 때 나는 향기랑 비슷하다. 비릿하면서도 향기로운, 흙냄새 같기도 하고 꽃 내음 같기도 한. 대충 처치를 했더니 진이 빠진다. 어젯밤에 제대로 못 잔 잠을 자야겠다. 몸을 매트에 던지고 머리를 베개에 묻는다. 상처를 피해 엎드려 웅크린다. 9-6 직장은 죽어도 못 구하겠지 씨발. 한때는 회사를 다니는 희망이라도 있었는데 평일 오후 네시에 잔다는 꼬라지가 한심하군. 의식에 꽂힌 플러그를 억지로 잡아 뺀다. 통증 때문에 찐득하게 눌어붙어버린 플러그는 의식의 콘센트에서 빠지질 않는다. 강제로 잡아채 흔들어서 뽑아 던진다. 억지로라도 자야 조금이라도 회복이 된다. 눈을 감고 뒤척이다 포기하고 내려놓는다. 비가 곧 그칠 것 같아 다행이다. 피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