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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순이 Dec 31. 2020

'쌈닭'의 탄생

과거 #2

입사하자마자 들어간 팀은 따끈따끈한 신생 팀이었다. 팀의 일하는 방식은 마치 소금은 조금, 고춧가루는 대충 적당히 넣으라는 레시피 같았다. 체계나 기준이 잡혀있지 않아서 결과물도 들쑥날쑥했다. 그래서 나의 임무는 미국 본사의 담당자와 전화 회의를 통해 제일 기초적인 지식부터 고급 정보까지 모든 상세 내용을 교육받고 팀에 전파하기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글로벌로 조율하여 업무의 표준을 정립하는 일도 하였다.

전화와 메일을 통해서만 일하자니 모두가 수평적이어서 스트레스받을 일도, 군더더기 같은 사건도 없었다. 문제는 업무 외의 다른 곳에 있었다.



회사 사람들은 남의 일에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가도 오지랖이 넓었고,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고 무신경한 말을 하는데 스스럼이 없었다. 지금은 '꼰대'라는 말이 널리 퍼져 자신이 꼰대일까 되돌아보며 경계하고 조심하지만, 그때는 '꼰대 짓'이 당연한 시절이었다.


"치마를 입고 온 건 일을 안 하겠다는 거지?"

치마가 불편해 보였나? 그러나 나는 치마 입고도 일할 수 있는걸!


"화장이 좀 진해진 거 같다?"

화장하고 싶은 날도 있고, 로션만 바르고 나오고 싶은 날도 있는데 매번 화장의 정도를 체크할 생각인 건가?


"어디 갔다 온 거야?"

화장실 다녀왔는데, 생리적인 현상도 보고해야 하는 건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는다는 느낌이 들고, 업무와 상관없는 일로 불필요하게 손가락질받으며 피해 의식과 피로감이 하늘을 찌르던 어느 날, 그렇게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 날, 나는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대리와 함께 현장에서 조사를 하게 되었다. 대화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으며, 그저 노트에 측정 결과를 휘갈겨 쓰기만 했다. 조사를 마치고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그 대리는 작성한 결과를 보내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따로 정리할 심상으로 지렁이가 기어 다니듯 썼기 때문에 차마 내어줄 수가 없었다. 이 글씨는 나만 해독할 수 있는지라 양해를 구하고, 액셀 파일로 문서화한 후 드리겠다고 했다. 그런데 다짜고짜 언성을 높이는 게 아닌가?


"보라순이 씨, 일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달라고 하면 주는 거라고!"

"보면 아시겠지만, 제 글씨를 알아보실 수 없을 텐데 이걸 어떻게 드려요. 제가 빠르게 타이핑해서 드리겠습니다."

"아니, 달라면 주지 왜 이렇게 말이 많아?"


그 순간, 이성의 끈이 '똑'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못 알아보면 네가 힘들지 내가 힘드냐라는 생각으로 쿨하게 적은 노트를 들이밀 수도 있었는데, 겹겹이 쌓아왔던 불만이 그렇게 터졌나 보다.


"못 드리겠습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정리하고 드리겠습니다."

"그냥 달라고, 그냥 줘!"

"그럴 수 없습니다!"


나도 큰소리로 받아치고야 말았다. 단호하고 거칠게 대답했다. 힐끔 옆을 보니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이 모습을 숨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나를 향한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지만 물러서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무섭게 째려보는 눈빛에 대항하며 나 역시 광선을 내뿜듯 노려보았다.



"그래? 그럼 네가 정리해서 직접 본부에 송부까지 해!"

잠시 동안 감돌던 정적을 깨고,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홱 돌아서서 씩씩대며 자기 자리로 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사람과 1:1로 대치하고 있었던 상황이 많이 공포스러웠던 모양인지 어질어질하기까지 했다. 결국, 그 일은 혼자서 정리하고 자료를 만들어 미국 담당자에게 송부하는 걸로 일단락되었다. (사실, 그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쌈닭 사원'이라는 꼬리표가 붙게 되었다. 날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으며, 그렇게 고립되어가는 것 같았다. 나 역시 별명에 맞춰서 항상 날이 서있었고, 나의 명성 때문인지 사적인 일로 지적하는 사람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다행히 업무적으로는 외국 사람들과만 교류했고, 그 분야는 본사에서 교육받은 내가 유일했으며, 한국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가. 나는 혼자가 되었고, 그렇게 오만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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