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점심시간과 방과 후 시간을 온전히 투자한 놀이의 양대 산맥은 고무줄과 피구요, 매 쉬는 시간마다 빠지지 않고 했던 게임은 공기놀이였다. 공기를 잘하게 되면, 웬만해서는 죽지 않았으므로 10년마다 고비를 만들어서 했다. 상대 친구가 한 번에 잡지 못 하게 어려운 위치에 놓인 공기알을 가리키면, 그 낱알을 집고 요리조리 피해서 사방으로 펼쳐진 알을 쓸어 담는 도전을 즐겼다. 공기놀이도 인생처럼 고비가 있어야지 밋밋하지 않고 더욱 흥미진진해지곤 했다.
공기놀이에서는 10년마다 였지만, 직장인에게는 3년마다 고비가 찾아온다고 했다. 지구력 없기로 소문난 나 역시 3년 차가 되자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1화에 언급했던 플랜 비가 다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던 찰나였다. 게다가 적금을 들어서 목돈을 마련했기 때문에 취업 전보다는 현실성이 더해졌다. 가고 싶은 학교를 선택하고, 그에 맞는 토플 점수나 원서, 에세이 등을 준비하기만 하면 됐었다. 스스로 돈을 벌게 되니, 부모님 반대에도 내 계획을 추진하여 나만의 길을 개척하기가 수월해 보였다. 그러나 인생에는 항상 변수가 가득하다는 걸 또 깜빡하고 있었던 걸까. 변수라기보단 플랜 비보다 더 소중한 존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게 더 알맞겠다.
첫 번째로 찾아온 일생일대의 이벤트는 2년 동안 교제했던 남자 친구와 식을 올리기로 한 것이다. 자상하고 성실하며, 심성이 올곧은 그 사람은 나의 본모습을 그대로 받아 들어주었다. 안에 있던 진정한 내가 나올 수 있게 도와주었고, 그 민낯마저 사랑으로 안아주는 사람이다. 다시금 돌아가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할 만큼 내 인생 최고로 잘한 일이었다.
결국 이루지 못한 유학의 꿈이 가끔 아쉽기도 하고, 신랑과 다투는 날에는 그때 결혼을 하지 않고 유학을 갔으면 어땠을까 잠시 생각해보지만, 역시 남은 인생을 함께 걸어갈 영원한 내 편이자 짝꿍을 찾은 거에 비하면 별로였을 것 같다.
경사스러운 일이 또 한 번 찾아왔다. 예쁜 첫째 딸도 내게 선물처럼 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철없는 엄마는 아이와 함께 또 반가운 게 있었다. 바로 출산 휴가와 그 뒤를 잇는 육아 휴직이었다. 마치 방학처럼 느껴져서 곧 쉴 날이 다가온다 생각하니, 회사에서조차 콧노래가 나올 만큼 여유도, 버틸 힘도 생겼다.
고비 3년 차에 일어난 기쁜 변화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기존에 있던 팀이 해체되면서 내가 담당하고 있는 업무에 더해 몇 가지 일이 다른 담당으로 가게 되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던 부정적인 환경을 벗어나게 되니 이건 뭐 겹경사를 뛰어넘는 트리플 경사였다. 내 일을 잠시 맡게 된 사람이 빨리 돌아와서 다시 가지고 가라고 앓는 소리를 하는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내 업무는 그대로이니 말마따나 책상 뺄 일도 없을 테고, 그저 아무 걱정 없이 1년 더 된 기간 동안 쉰다는 생각에 한껏 들떠올랐다.
최대한 빨리 쉴 수 있는 날부터 출산 휴가를 시작했다. 아침에 느릿느릿 일어나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산모 요가 교실에 갔다가 집에 오는 길에 장을 보고 저녁을 준비하는 일과도 나쁘지 않았다. 우리 세대에서는 집에서 전업주부로 썩는 (그렇다, 썩는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능력이 없어서이다 내지는 일하는 여성이 아름답다는 무언의 규칙이 있었나 보다. 나도 모르게 집안일의 가치를 낮춰 보고 있었는데, 이거 만만치가 않을뿐더러 가족을 위해 노력하는 순수한 노동이었다. 나 외의 다른 가족 구성원을 생각하고 위해주는 배려도 그 노동 속에 포함되어 있다.
자다가 다리에 쥐가 나서 깨기도 하고, 무리하다가 배가 심하게 당겨서 웅크린 채 낑낑댄 적도 있었지만 아이가 뱃속에 있는 동안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아니면, 벌써 다 잊은걸 수도?) 안에서 꼬물꼬물 거리며 배를 노크할 때면 반갑고 귀여웠다. 배 안에서 나에게 말을 거는 듯한 그 느낌이 무척이나 좋았다. 그렇게 한 달 반은 금방 지나갔고,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갓 태어난 아이를 바라보고 품에 안았을 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겠다고, 이 아이는 꼭 내가 행복하도록 지켜주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아이가 배에 있을 때가 편하고 좋을 때라고 귀가 닳도록 들었지만, 출산 후 육아 생활은 의외로 힘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도 당연한 게, 친정 엄마가 같이 지내주면서 나의 몸조리를 도와주시는 데다, 밤새 우는 아이를 데리고 주무셔서 덕분에 나는 매번 꿀잠을 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서 엄마가 해주시는 맛있는 밥을 먹으며, 힘든 부분 싹 빼고 아이를 돌보니 몸도 마음도 편했다. 100일의 기적으로 통잠을 잘 수 있을 때까지 철이 덜 든 둘째 딸은 그렇게 엄마 옆에서 어리광만 부렸다.
학교 다닐 때는 방학이 오래되면 지겹고 심심해서 빨리 개학이 되었으면 하곤 했었는데, 회사는 전혀 그런 게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육아가 힘들어서 복직할 날만 기다리거나 그것도 모자라서 휴가일을 다 채우지 못하고 일찍 회사에 간다는데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가기 싫었다. 그렇지만 앞선 무언의 규칙이 내게 속삭이고 있었다. '회사는 무조건 다녀야 해. 회사 안 다니고 엄마들끼리 몰려다니는 게 얼마나 흉한데. 남편이랑 애만 보며 살 거야? 남편이 번 돈으로? 그건 실패한 인생이야.' 얼마나 편파적이고 무지했으며 생각이 짧았던지, 지금 생각해보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너도 나도 한 치 앞을 못 보고 말로만 지껄였던 것 같다. 그래도 울 엄마 역시 둘째 딸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길 바랐기 때문에 복직 후 아이를 봐주신다고 하셨으니, 딱히 다른 방향을 돌아볼 생각조차 안 했다.
1년의 공백이 무색하게 게이트에서 출입증을 찍는 순간, 바로 몸과 마음가짐이 '회사원화' 되었다. 사무실에 앉아 있으니 1년 전이 아닌 바로 지난주 금요일까지 나왔다 주말정도 쉰 듯한 기분이 들었다. 휴직해있는 사이 담당 내에서 조직 개편이 있어, 이전과 다른 팀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잘 모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다들 호의를 가지고 대해주니 이전 팀과 비교가 되었다. 바뀐 팀이 마음에 들었고, 이제 더는 외톨이가 되기 싫었다. 예전의 '쌈닭' 이미지를 버리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려고 노력하기로 했다. 그런데 과연 이게 좋은 선택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