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6
팀 이동은 번갯불에 굽듯이 빠르게 진행이 되었다. 이전 팀장과는 따로 만나서 면담을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전 팀장이 나에게 갖는 감정이 고과를 낮게 준 데에 대한 미안함인지 뒤에서 몰래 일을 도모해서 업무까지 들고 속된 말로 튄 데에 대한 배신감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주변에서는 팀에서 키워주지 않아서 다른 팀으로 옮긴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고과를 낮게 받아서 그 앙심으로 이동한다는 사실이 내심 양심에 찔렸고 창피하기도 해서, 소문대로 사람들이 믿었으면 바랐다.
나의 회사 생활은 모든 게 초고속으로 변해서 적응이 무엇보다 시급했던 시점이었지만, 그런 사정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소중한 선물이, 물론 고맙게, 나를 찾아왔다. 사랑하는 둘째가 우리 부부에게 온 것이다. 그러나 첫째 때와는 회사에서의 내 입지가 많이 달라져있어서, 방학을 기다리는 철없는 아이처럼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먼저, 전문가를 육성하지 않고 모두가 모든 일을 두루두루 잘하게 만들겠다는 윗선의 방침에 따라서 입사 때부터 맡았던 업무를 출산 휴가를 기점으로 다른 사람에게 주게 되었다. 우리 부서의 메인 업무를 익혀서 나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유연하고 폭넓은 직장 생활을 하라는 의도라고 하지만, 당사자인 내 입장에서는 일을 뺏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나는 그 업무를 무기 삼아서 팀을 옮기지 않았던가. 그러나 1년 남짓 출산과 육아로 자리를 비워야 하는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내 밥그릇을 못 챙긴 꼴이 되었다.
거기에 더해, 팀장이 말하길 팀원들 중 아무도 나랑 일을 하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남초 회사이다 보니 나 빼고 팀원 전체가 남자였는데, 여직원을 대하기가 많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여직원에게 맘 편히 일을 시키기도 힘들 것 같다고 했다나 뭐라나. 여자는 회사보다 가정이 중심일 테고, 곧 아기를 낳으러 휴가를 갈 것이니 그 빈 시간 동안 자기네들이 두 배로 일할 것 같다는 게 이유란다. 그 말을 듣자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첫 팀에서처럼 외톨이에 쌈닭이 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참기로 결정했다. 결국, 내가 여자라서 싫다고는 했지만 자기가 차장급 중에서는 막내라서 울며 겨자 먹기로 날 받았다는 상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나는 기존 업무와 새로운 업무를 동시에 소화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내 위치를 다져서 복직 후에도 비빌 데가 있길 바라는 마음에 가끔은 상사나 팀장에게 생색을 내고 싶었다. 내 실력을 믿고 깝죽대며 팀을 옮긴 벌을 이렇게 받나 보다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임원진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 중요한 자리가 있었다. 곧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게 된 그 기존 업무와 관련된 성과 보고였는데, 출산을 하게 되면 전문적인 타이틀이 없어지니 대신 얼굴 도장이라도 제대로 찍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날 필요 이상으로 압박해서 그런지 회의실에 들어가기 직전에 화장실에 가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사실 긴장감 때문이었지 실제로는 심하게 급하지 않아서 문제 되는 상황은 아니었기에 고민을 하던 찰나, 그 상사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다.
"무슨 일이야? 불편해 보이는데 무슨 일 있어?"
"화장실 가고 싶긴 한데... 괜찮습니다. 참을 수 있어요."
"아니, 뭘 참아. 아직 순서가 남기도 했고, 시작하면 잠깐 붙잡고 있을게."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웬일로 친절하게 대해주는 상사가 의심스러웠지만, 갔다 오는 시간이 5분도 안 될 텐데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만가지 안 좋은 상상이 들어서 재빨리 일을 마치고 종종걸음으로 다녀왔는데, 아뿔싸, 그 상상은 현실이 되어있었다.
들어가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내가 만든 자료를 스크린에 띄우고 발표를 하고 있는 상사의 모습이었다. 불필요하게 화장실이 급하다는 떠벌린 것도 모자라 바보같이 순진하게 믿은 내가 한심스럽기도 하고, 부드럽게 살살 다독이며 꾀다가 뒤집어쓴 양의 탈을 집어던지고 본심을 드러낸 늑대처럼 나의 통수를 친 그 사람이 치가 떨리게 혐오스러웠다.
도저히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어서 화장실로 달려가 아기같이 큰 소리로 엉엉 울었다. 회사에서는 금기시되는 행동이지만, 눈물이 줄줄 나는 걸 참을 수가 없었고, 속이 상하고 화가 나서 목청껏 울고 말았다.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도 아니었고 충분히 내 성과를 뺏을 사람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음에도 그 상사에게 말려들어 함정에 빠진 나 자신이 너무 미웠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일은 내 인생에 있어서 티끌 같은, 그저 돌이켜보면 짜증만 나는 단순한 해프닝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보고 때문에 그 상사가 성공하고 승진하며 승승장구했느냐. 그것도 아니다. 내가 그 발표를 했으면, 내 삶이 달라졌을까? 전혀 아니다.
그러나 그때는 너무 분해서 잠도 못 자고 이불 킥만 날렸었다. 그런데도 멍청하게 직접 따지거나 내 일을 지키기 위해 맞서 싸우지 않았다. 일단, 적으로 생각하자고, 회사에 내 편은 없다며 내 촉은 맞으니 의심의 끈을 놓지 말자 따위의 교훈도 습득하지 않았다. 오로지 날 싫어했고, 지금도 날 싫어하는 그 상사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삐뚤어진 생각뿐이었다. 점점 실패자가 되어가는 느낌이 들 즈음, 둘째를 낳으러 출산 휴가에 들어갔다. 그러나 첫째 때와는 달리, 휴가 중에도 계속 회사 생각을, 더 정확하게는 걱정을 했다. 이제 내 업무도 뺏겼고, 상사는 날 싫어하는데 나 이제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