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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Dec 15. 2020

사색84. 화해

5월 15일(목)

사장 면접 일정,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잖나. 지금 연락 오지 않는 걸 가지고 하루 종일 죽겠네 살겠네 애쓰는데, J회사 채용 당락이 인생의 진로라는 지도에서는 해운대 바다의 파도 몇 번 정도 되지 않을까. 직장 말고, 진로를 고려한다면 당장 이런 일로 일희일비하는 건 에너지를 너무 소모적으로 쓰게 된다. 그걸 알면서도 막상 그걸 마주하고 있으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앞으로 살아낼, 일을 해야만 할 날들이 얼마나 많겠나. 몇 번의 면접 당락 가지고 이렇게 불안해하고, 꼭 남는 장사를 하자고 따지는 건 우습지만 이런 소모적인 태도는 상황을 맞서는 데 틀린 방법인 듯.

      

‘기다릴 수 있는 게’ 변수라면, 조금 더 기다려보자. 괴롭지만 괴로울 필요 있나. 생각처럼 되지 않는 게 괴로울 일인가. 언제 내 생각대로 된 일이 있나. 대부분 내 뜻과 달리 흘러가다 간혹 내 뜻대로 된 건 몇몇, 그 몇몇이 내 뜻대로 된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지. 몇몇 내 뜻대로 된 걸로 마치 대부분 내 뜻대로 돌아간 것처럼 착각하며,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내고, 짜증 내다간 이 세상 살아가겠나. 오늘 지금처럼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자연스럽다. 지금 연락 오지 않는 게, 연락 오지 않을 수 있는 게 자연스러운 거.

      

직장에서 일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 직종에 임하는 신념 역시 중요한 듯하다. 신념 같은 건 리더, 중견간부, 선임이나 주변 동료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그런 동료와 직장 생활을 같이 하면서 일에 대한 태도를 확립하게 된다. 혼자 쌓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서 배우는 것이다. 요즘은 옛날 신약성경처럼 예수의 열두 제자 같은 후배들이 나오지 못하는 게, 예수의 삶을 성경에서만 볼 수 있으니까, 가까이 지내는 사람 중 예수 같은 리더가 없으니 제자가 양성되지 못한다. 열두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3년 동안 함께 먹고 마시고 자면서 보고 배운 것으로 신념, 신앙을 형성하지 않았을까. 현대인이 직장을 선택하는데 소득은 물론이고 같이 일하면서 신념을 파생시킬 리더까지 고려하지 않을까. 고용인 피고용인으로, 시키는 시람 이행하는 사람으로서의 관계가 아니라, 일이야 비슷비슷한 일이니, 이번에 재취직은 같이 일하고 싶은 리더와 함께 할 수 있도록 기회를 기다리자. 지난 선준욱 과장이 이번 취직은 내가 회사를 선택하고 싶다는 결단을 했단다. 위대한 도전이다. 그동안 다시 취직만 하게, 제 책상 다시 하나 마련하게 해 주세요 기도하다가, 오늘은 존경하고 위대한 신념을 파생받을 수 있는 리더를 만나게 해 주세요 그걸 위해서 기다리겠습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일하면 40살까지 30대의 젊은 시기에 제 인생의 신념을, 공익의 가치를 알고, 공익과 사익의 적정한 접점을 알려줄 수 있는 리더를 만날 수 있게, 그렇다면 이 시간을 즐겁게 기도하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고 기도한다. 기도가 ‘조금 더 기다릴 수 있다’로 바뀌어간다.


이번 면접을 기다리고 있는 회사 사장은 그리 탁월한 양반 같지 않아 보여, 필드에서 사실 같이 일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당장 어디라도 가야 한다는 생각에 이리저리 이력서를 넣다 마지막 면접을 남겨둔 지금까지 오니, 이 사장이랑도 잘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생각해보면 최초로 함께한  L사장하고 일할 때는 글 문장의 분명함을 배웠고, 이후 대학원으로 가서 지도교수랑 함께 할 때는 개인의 행복 추구라는 가치를 배웠고, 졸업 후 A사장이랑 잠깐 일할 때는 대외적으로 명망이 있던 사람이라 이분이 진짜 리더라고 생각했는데 A사장은 내가 그만두기 전에 자기가 먼저 회사를 그만둬서 황당했고, 이번에 날 짜른 사장은 이 사람으로부터 뭔가를 배울 수 있나 하고 기대했었는데 아마추어리즘만 보다가 짤렸다. 앞으로 만날 새로운 사장, 리더가 아직 누군지 모르지만 존경할 수 있는 리더를 만날 수 있을까. 아니, 근본적으로 같이 일하는 회사 사장을 과연 존경할 수 있을까? 하루 10시간, 평생 30년을 회사에서 생활하면서 거기서 존경하는 사람 한번 만나지 못하는 건 너무 불쌍하다. 

      

구약성경 창세기의 요셉 챕터를 읽는다. 드디어 형제들이 다시 요셉을 만난다. 요셉의 화해에 형제들은 이놈이 왜 이러나 불안하다. 자기들이 요셉을 죽이려 했던 일을 기억하고 복수할까 두렵다. 당시 최고 강대국 이집트의 총리가 된 동생(황당하지), 그런 총리가 진심을 담아 극진한 대접을 하니 형제들의 두려움은 사라진다. 이 챕터에 제목을 짓는다면 ‘은혜가 두려움을 덮다’이다. 내게도 직전 회사의 사장, 직원들에 대한 복수심, 어디 벗어놓은 신발에다 침이라도 뱉어야 속이 풀릴 듯한, 이런 심정은 어떡하면 사라질까. 다시 취직하면 좀 누그러들까. 성경에서 나온 요셉 형제들의 화해는 현실적으로 있을 법한 일이 아닐 듯, 마냥 그런 화해를 상상만 해도 가슴 설렌다. 두려움, 죄의식, 복수가 한 사람의 이해, 인내 덕분에 화해가 시작돼 평화로 변한다. 아름답다.      


집에 돌아오는 길, 문득 사표를 썼다는 차동수 부장께 전화를 건다. 미움, 복수 마음이 없어졌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복수할 생각 없으니 순수하게 연락할 수 있는 창의적인 관계가 생긴다. 차 부장을 시작으로 직원 모두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 인사를 한다. 물론, 사장 시파새키 빼고. 모두들 미안해서 그동안 나에게 전화하지 못했단다. 다들 미안한 마음이란다. 남은 사람들이 배신자가 된 것 같단다. 그래, 너희 배신자 맞아 라고 소리치려 했으나, 그러지 말고 마음 편하게 좋게 지내라고 격려한다. 실직자인 내가 근로자인 그들에게 격려를 한다. 복수심, 시기심은 사라진 건가. 솔직히 동료 직원들에게 무슨 미움이 있겠나. 사장에 대한 미움이 번진 거지. 그렇게 내 안에 분노가 평화로 변한다. 비록 전화 통화였지만, 그래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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